지구 반대편에도 내 행복은 없다.
첫 남미. 아르헨티나 1일 차.
아무감흥 없음. 도파민이 말라 비틀어진 걸까. 첫 남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 일까?
26시간 비행.
아틀란타 3시간 경유.
아틀란타 갈 때는 국제학교 학생과 선생님들 사이에 껴서 가고, 앞발차기 하는 뒷자석 할아버지 덕에 한 숨도 못 잤다. 경유 후 부에노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1시간 정도 졸았을까.
출국 전날 공교롭게 입술에 대왕 헤르페스 4개와 함께 몸살 기운이 와 비행 내내 항생제와 종합감기약을 연신 털어댄 탓일까. 무박 2일 차인데 크게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다. 무엇보다 다행인건 몸살 기운이 없어졌다. 나의 ‘첫 남미’ ‘첫 장기비행’ 등 아무래도 ‘처음’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한 탓일까.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야자수를 보고 있자니 하와이 같기도 하고.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 사이 새삥 건물 몇 개를 보고 있자니 약간 대만 홍콩의 허름한 동네 같기도 하고. 아직 잘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만의 색깔을. 특이한 점은 정오가 다되는 시간인데 문을 연 상점이 없다. 나는 이 나라 겅제가 망해간다더니 진정 상권 경제도 다 무너져 절도와 총살이 만연한 도시인 걸까 잠시 두려움에 떨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도 5월 1일은 노동절이란다. 속으로 팔자 좋다 생각했다. 물론 난 자영업자가 아니라 매년 노동절에 따박따박 쉬는 직장인이지만, 한국의 자영업자들은 노동절은 커녕 오히려 대체 휴일에 다들 해외여행 간다고 상권 경제를 위해 대체 휴일도 막아달라 하는 지경이건만. 아무렴 숙소에 도착후 물을 사러 어찌저찌 동네 제일 큰 마트 Jumbo를 찾아갔는데 아뿔싸 문을 닫았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여기가 입구가 아니냐 하니 쉬는 날 이란다. 노동절에 마트도 문을 닫는 구나..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치안이 제일 좋다는 부촌 Palermo 에 숙소를 잡았다. 에어비앤비 특 열쇠를 찾는 과정이 마치 방탈출 게임을 방불케 했으나 복층에 인스타 감성 분위기 까지. 일단 분위기는 합격이다. J 답게 여행 직전 너무 많은 블로그 여행 후기들을 정독하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Palermo 또한 마냥 안전하지 못하다는 텍스트 한 줄에 숙소 가는 내내 폰을 주머니에 넣고 잠궜다. 손에 꽉 쥐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못 했지만 왠 걸. 동네는 깨끗하고 생각보다 안전했다. 26시간 비행 후 씻지도 않고 바로 나간 탓일까. 되려 내가 로컬 같고 로컬들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험악한 치안 속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현지 동기화를 의도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동양인에 행색이 누가봐도 관광객 같아 쉽지 않겠거니 했는데. 별 거 없네. 아르헨티나는 현지인들도 깔끔하고 다들 멀끔하다.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에서 질리도록 봤던 홈리스가 별로 없어 더 안전하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내가 다닌 안전지대 한정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래쪽인 한인타운은 발 닿는 순간 아이폰이고 뭐고 다 털렸다는 후기가 있어 나의 일반화의 오류겠거니 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근데 젠장.
오는 길에 소고기 스테이크 한 덩이 푸짐하게 썰고 왔는데도 당최 잠이 오지 않는다. 원래 내 계획은 숙소 도착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시내 꽃집에서 암환전을 하고 주위를 둘러 볼 생각이었으나 그럴 여유가 없다. 이대로 눈 붙이고 가만 있자니 1일 차 지만 벌써 시간이 아깝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탱고 쇼 하나를 꼭 봐야지. 꼭 가고 싶었던 탱고 쇼 Bar sur 예약을 알아보았는데 좌석이 없다. 노동절이라 쉬는 건지 인기가 많아 표가 다 팔린 건지 알 수가 없다. Chat GPT에게 아르헨티나 No.1 탱고 쇼를 물어보니 El Querandi 라 한다. 블로그 후기 몇 개를 찾아보고 Solo Show 티켓을 $62에 예매했다. 도착하기 전에는 이왕 간거 저녁 스테이크 코스가 포함된 Cena Show에 왕복 픽업 랜딩 서비스가 포함된 VIP 패키지를 구매해야지 했지만. 막상 와서 살벌하게 오른 물가를 직접 체험해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스테이크는 점심에 먹었고 이동이야 우버도 안전하니까. 합리적인 비용 지출을 위해 무한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J 스럽게 Whatsapp 으로 식당에 직접 문의해 정확히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하고 내 좌석 위치는 어디쪽 인지를 문의했다. Around 21:30 이라는 답변이 왔고 내심 좀 더 쉴 수 있겠다 안도했다. 나의 필살기인 이번 쇼가 나의 첫 탱고 쇼라..는 식의 어필로 좋은 좌석을 배정해달라 했으나 소름끼치게 구석 자리로 배정 받았다. 어쩔 수 없다. 앞 좌석은 VIP 티켓 구매자 우선 이다. 자본주의는 늘 근거가 확실하다. Money is the best.
아직 아르헨티나의 A 도 구경 못 했으니 아무 감흥이 없는 것이 맞지만, 성격이 급한 탓일까. 기대가 컸던 탓일까. 왜 감흥이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쏟아 내본다. 숱하게 해외여행 하면서 확실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받고 행복했던 곳이 어디었더라..두브로브니크! 그리고..라스베가스! 이렇게 첫날 약간 실망스러운 듯한 느낌이 호주 멜버른을 여행했을 때와 비슷하여 벌써 걱정이 한아름 몰아쳤다. 왜냐하면 멜버른 여행이 내 인생 역대급 망한 최악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나라답게 호주만의 음식이 없었고, 가장 맛집이라 간 곳이 마라탕 집. 물론 훌륭하게 맛있었으나 내가 왜 늘 집에서 시켜먹는 마라탕을 이 곳 호주 땅까지 와서 먹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갔다. 유럽 같으면서도 홍콩 같으면서도 당최 그 도시만의 색깔을 느낄 수 없었던 곳. 하필 겨울 우기에 가 비가 오락가락 하는 늘 흐린 날씨도 한 몫 했지만, 결정적으로 같이 여행 간 고향 친구와 여행 텐션이 맞지 않았다. 나는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일 투어가 끝나면 몸살 기운이 와 쓰러질 것 같으면, 그 친구는 머리 잠깐대고 꿀잠 자고 일어나선 늦은 밤 클럽을 가자고 졸라댔다. 나도 해외 여행 가서 클럽 체험?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쓰러질 것 같은데요..여행 이후 그 친구와 화해하고 다시 이전처럼 지냈지만, 얼마 못 가 우린 의절했다.
그래서 걱정부터 몰아쳤다.
이 여행도 그 때와 같이 ‘이게 뭐지..내가 이럴려고 여기까지?’의 느낌으로 마무리 될까봐. 그렇게 걱정하다 한 시간 쯤 잠들었을까. 코를 골며 잠들었던 Bryan 이 깼다. 내가 20시 쇼라고 안내한 탓에 불이나케 일어나 씻고 단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꿀잠 잘 땐 뱃고동 소리보다 큰 코 고는 소리에 내가 잠들지 못했고, 내가 눈 좀 붙여보려 하니 그가 깼다. 피곤한 탓일까. 내가 한국에서 부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 여행은 내가 가고싶어 했고 내가 주도한 만큼 모든 일정과 부킹을 내가 맡아서 했고, 이동(국내선, 버스)+ 투어는 내가. 숙소는 하나하나 찾아 Bryan 에게 보내 결제만 그에게 맡겼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나 혼자 알아보던 중 문뜩 화가 난 적이 있다. 하필 그 때 Bryan 이 나에게 아르헨티나의 전압을 물어봤었다. 내 화에 불을 지핀 한 마디 랄까. 나는 즉시 ‘내가 네 비서니? 너는 구글링이나 Chat GPT한테 물어볼 생각은 못 하니?’ 라며 다박다박 면박을 주고 싶었으나, 짜증을 내선 무엇하며 영어도 짧은 탓에 “구글에 찾아는 봤니?“ 라는 짧은 말로 대꾸하고 말았다. 출국 당일에도 이런저런 여행 걱정 중 에어비앤비 숙소 비번과 체크인 방법은 안내를 받았나 하는 걱정에 숙소 담당인 Bryan 에게 노티를 했고, 역시나 호스트의 안내 방법을 제대로 숙지 안 한 탓에 한 참을 문 밖에서 방황해야 했다. 아무튼 우린 탱고 쇼에 갔고, 그는 해당 상품이 1) Only show - 음료, 디저트 포함 2) 식사 포함 3) 픽업랜딩 포함 등
세 종류가 있다는 것은 당연 알지 못 했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그의 말에 1) 로 예약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메인 디쉬를 먹고 싶단다. 하지만 오늘 암환전을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우리에게 Cash가 많지 않다며 스테이크 2개를 주문하려다 말고 스테이크+파스타를 주문했다.
그리고 나서 긴 정적.
그는 연신 심각한 표정에 말이 없었고. 나는 이 여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현금이 없으면 카드를 긁던가 아니면 먹지를 말던가 꼭 먹을 때엔 배가 안고프다 하고 안 먹으려는 때에 배가 고프다 하는 그가 이해가 안 갔다. 심기가 불편하던 찰나 다시 한번 나의 화에 불을 지핀 그의 ‘비웃음’. 말 한 마디 없던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비웃는 것이다. 그것도 갑자기. 언어는 100% 통하지 않지만 비언어적 표현은 10,000%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비웃음을 보자마자 Why라고 물었고 그는 늘 그렇듯 Nothing 이라고 했지만 이번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화를 내며 Why 라고 되물었고 한국말이 통했다면 더 큰 화를 내며 이것저것 따졌겠지만 다행인 걸까 언어가 짧아 화를 더 이상 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본인이 웃지 않으면 심각하거다 우울하다 하니 내 얼굴을 보며 Smile 미소를 지은 거란다. 슈발..내가 바보도 아니고 미소랑 비웃음을 분간도 못 할까봐. 기분이 팍 상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불편해 후에 나온 음식들에 1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입술 헤르페스 때매 식사에 포함된 와인에도 입 한잔 대고 끝. Bryan 은 옆에서 디저트까지 아주 싹싹 비워내고 본인도 속이 답답한지 레드 와인을 탈탈 털어냈다. 내 생애 첫 탱고 쇼는 단연 멋있고 감명 깊었으나 관람하는 내내 이게 맞나. 여기까지 와서 뭐하는 짓인지. 행복하지 않았다. 내 행복의 기준은 저 어디 하늘나라 끝에 있는 걸까. 착찹하고 답답했다. 적어도 지구 반대편엔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행복.
그렇게 찜찜하게 돌아와 일단 누웠다.
다음 날은 이과수 폭포를 관광하는 날이니 대자연의 경관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지는 않을까. 여행을 내가 주도해서 한 만큼 내가 내린 결정에 Bryan은 한 번도 토를 단 적이 없었다. 불현듯 전남친의 항변이 떠올랐다. 내가 늘 너는 그 나이 먹도록 전여친이랑도 어디 데이트 한 곳이 없느냐. 전여친들과 갔던 곳이어도 좋으니 나를 어디 좀 데리고 다녀달라 하소연 하면, 본인이 원래 잘 따르는 성격이기에 지금껏 나와 트러블이 없을 수 있었다고. 내가 어디 가자하면 그는 늘 군말없이 시동을 켰고 결제를 했다. 근데 그 때는 좋다 해놓고 이제와서 왜 너는 말이 없냐니. 입 떼면 또 꼴에 자기 주장까지 있네 했을 거면서. 지금 Bryan 과 같은 상황 이었다. 저 불쌍한 인간이 무슨 죄가 있을까. 걍 나라는 인간이 애초 꼬인걸까 잘못 된걸까 자기 반성으로 마무리. 나이가 들수록 관대해지고 마음이 넓어진다 생각했건만 요즘엔 나의 틀에 박혀 점점 더 뾰족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의 언행이 ‘다를 수 있음’을 이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 언제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 경지에 닿지 않는 이상 결혼은 무슨 연애도 꿈 깨야될 것 같다. 일단 오늘은 오늘. 내일 세계 3대 폭포 보고 시원하게 기분 풀고 맛있는 와인으로 부디 하루 잘 마무리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