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3일 차.
눈 뜨자 마자 배가 고파 미리 봐두었던 숙소 근처 El Cafe에 방문했다. 서울의 여느 성수동 핫한 카페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야무지게 브런치 코스를 싹싹 비워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여유로운 아침공기를 마셨다. 이상하게 이 동네는 깨끗한데 오줌 찌린 내가 사방에서 난다. 아마 강아지를 많이 키워 그럴 수도 있고, 아님 내가 숙소 앞에서 직접 목격한 노상방뇨 아저씨들 때문일 수도 있고. 그래도 오래간만에 여유로이 이쁜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나니 이 여행 처음으로 기분이 좋다. 전날 완벽했던 이과수 투어 및 동네 예쁜 카페와 바들. 아마 위스키와 온갖 술을 들이 부어 푹 잔 탓이겠지. 이번 여행 처음으로 숙면하고 일어난 아침. 모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숙소에 가서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소원이 없겠다만. 잠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당장 나가자니 피곤하다. 벌써부터 하루 온종일 내가 구글맵을 보며 가이드를 할 생각에 짜증이 난다. 숙소 밖을 나가면 투어 가이드 일 시작인 느낌? 최대한 소파에 몸을 뉘어 본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Bryan 은 언제 나갈 거냐며 살짝 보채듯 곁에 알짱대는데 그럼 네가 뭐 하나라도 알아보던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계속 눠 있을 수는 없으니 대충 구글맵으로 오늘 들릴 코스를 맘 속에 정해놓고 암환전 할 꽃집 할배부터 찾아갔다.
막상 택시에서 내리니 꽃집이 안 보여 당황했는데 저 구석에서 회색 머리의 할아버지가 깜비오? 하며 나를 바라본다. 앗..? 저분이구나. 깜비오 하며 다가갔다. 얼마 환전 할 거냐며 오늘 환율은 1,140원 이란다. 오 낫 배드. 바로 옆 꽃 집에서 쿨 거래를 하고 나의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핑크색 건물이 인상 깊은 정부 청사를 찍고 내가 미리 찾아둔 뷰맛집 카페를 찾아갔다. 하나 남은 자리가 보여 혼자 달려가 자리부터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스타 핫걸 언니들이 여기서 사진 좀 찍어도 되냐길래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고. 내 사진도 좀 찍어달라 부탁했다. 인스타로 하나 되는 대통합의 장. 커피 한 잔 마시고 쉬며 피자 게린을 향할 준비를 했다. 커피에 빵도 한 조각한지라 배가 엄청 고프진 않지만 그래도 시내로 나온 이상 꼭 먹어야 되는 피자 맛집을 지나칠 순 없지. 10여 분쯤 걸었을까 가는 길에 오벨리스크를 지나치고 보니 엄청 큰 간판이 보였다. 뭐야.. 여기 그냥 대기업이잖아. 장사가 너무 잘돼 뒷건물까지 붙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주문하는 데만 꽤 걸렸다. 나는 양파피자가 유명하다는 걸 듣고 왔는데 당최 메뉴판에서 찾을 수가 없어 대충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맥주 한 잔 하며 빨리 피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와 미친 비주얼
세상에서 이렇게 치즈가 많이 들어간 피자는 처음이다. 치즈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블로그에 맛평이 갈린다는 후기가 있었는데 알 것 같았다. 리얼 양파 토핑밖에 없어 약간 심심하고 또 너무 느끼했다. 토마토 하나만이라도 얹어주지.. 그리고 양이 너무 많았다. 제일 작은 사이즈를 시키고도 한 조각에 배가 터질 듯했다. 남은 피자를 포장해갈까 하다 이거 뭐 데워먹음 맛있겠나 싶어 그냥 나왔다. 그저 아르헨티나에 제일 가는 피자 맛집을 다녀왔다는 것에 만족. 그 후 내가 찾아놓은 포토 스팟을 갔는데 이런 예약제였다. 당일은 이미 마감. 흑. 하는 수 없이 다시 와야지 하고 나서는데 이미 나의 투어 일정은 다 끝났다. 암환전 후 시내 관광명소를 들리고 피자 맛집까지. 오후 네시 반 정도가 되었다. Bryan 에게 나는 다 끝났다. 집에 가고싶니 더 놀고 싶니 라고 하니 더 놀고 싶단다. 그럼 네가 나를 리드하렴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몇 분 정도 혼자 걸어다니더니 더 이상 할 게 없다 생각했는지 집에 가잔다. 그래 너가 뭘 찾을 리가 없지. 그대로 숙소에 가 뻗어버렸다. 그러고 깼더니 이미 11시가 넘어 있었다. 이대로 걍 계속 잘까..? 이미 푹 잤는데 어케 더 자노. Bryan 이 숙소 근처 문을 연 바를 찾았다며 같이 가잔다. 그래 너도 이정도는 찾는구나.
아니 웬걸.
동네 펍이라더니 핫해도 너무 핫하다.
라운지 클럽이었다. 핫한 언니 오빠들이 쫙 빼입고 춤추고 있는데 나와 그만 추리닝 바람이었다. 부끄러워 구석에 몸을 숨기고 한 잔씩 하는데 여기도 부엌은 마감이라 안주는 주문이 불가하단다. 나는 늦은 점심으로 먹은 피자가 부대껴 배가 고프진 않았으나 그가 너무 배고파했다. 그래 그럼 너가 찾아봐 식당을. 그랬더니 아무데나 발닿는 곳마다 들어가는데 부엌은 마감했단다. 결국 24시간 야장 바이브 피자집에 자리를 앉아 피자에 맥주를 연신 마셨다. 이 아름다운 곳. 지구 반대편에 있건만 한 번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그저 하루하루 이 거구의 남성을 어찌 데리고 다니나 걱정 뿐이다. 챙겨야 할 것, 시간 맞춰야 할 것, 모든 다음 스케줄에 대한 걱정 뿐. 지금을 아름답게 즐길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여행도 인생도 같이 하는 사람이 중요하구나. 나의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 내가 여행코스를 짜면 누군가는 맛집을 알아봐주고. 내가 피곤해하는 날이면 본인이 자처해서 나를 데리고 다녀줄 수 있는 사람. ‘파트너’. 나는 같이 웃고 즐겨줄 여행 파트너가 필요했던 거지 ‘팔로워’가 필요했던 건 아닌데.. 혼자여도 힘들 빡센 남미 여행이 둘이 되니 두 배로 힘들다. 아니 어찌 우리 엄마아빠도 아닌 젊은 청년이 100% 온전히 나에게 기대기만 할 수 있을까. 제 3국에 오니 그의 본 모습과 현실이 보였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끝났다. 여행도 인생도 열정적으로 이끌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여행에서도 수동적인 사람이 과연 인생에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그렇게 이 먼 곳에서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상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왜 서울에서는 자아성찰이 불가능했을까^_^ 이래서 사서 고생들 하는건가..
아무튼 나와 맞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해 이 먼 곳에서의 여행이 즐겁지 않은 것은 슬픈 일이나. 이것도 좋은 경험이겠거니. 이렇게 나 자신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