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길냥이가 낫다.

by 초록

El Chalten.

El Chalten 마을 입구

파타고니아의 마을.

3시간의 비행과 3시간의 고속버스를 달린 끝에 피츠로이 마을에 도착했다.

아름답다! 파타고니아 브랜드의 배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근데 생각보다 너무 춥다. 아니 무슨 나라가. 한 나라안에 4계절이 다 있어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초가을. 이과수는 여름. 엘 찰텐은 겨울이다. 작은 동네라 우버도 없어 슬리퍼 신은 채로 숙소로 향했다. 20여 분 남짓한 그 길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던지. 춥고, 가방은 무겁고, 언제 도착하냐며 계속 보채고 짜증을 냈다. 그만 좀 찡찡대라며 혼나다 겨우 도착한 숙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어비앤비 청결 상태가 별로였어서 그런가 이 촌 구석의 작은 숙소가 더 안락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 대박인 건 머리 대자마자 코 고는 그분. 존경스럽다. 그러다 갑자기 깨서는 문을 열더니 주인집 히터기 위에 곤히 누워자던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그 아기는 들어오자마자 방에 걸려 있는 나의 후리스 냄새를 킁킁 맡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침대로 올라왔다. 이런 야생 고양이가 나에게 다가오는 건 처음이라 약간 졸았는데 웬걸. 내 품에 안겨 꾹꾹이를 하지 않나 애교를 피워대는 것. 너무 귀여웠다. 고양이도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는구나. 애교를 잔뜩 부리고 나서는 내 겨드랑이에 자기 털을 대놓고 뒤돌아 자고 있었다. 귀여운 놈. 내가 이 여행에서 너 하나 덕에 웃는구나. 이대로 서울에 데려가고 싶었다. 이러나저러나 나 혼자 못 자고 있어 Chat GPT 에게 고양이에 대해 물어 봤는데, 길냥이면 몸에 진드기나 벌레가 있을 수 있으니 너무 가까이 하면 안된단다. 네..? 이미 제 옆에 꼭 붙어서 같이 누워 있는데여. 이리봐도 저리 봐도 털도 깨끗하구 체크인 할때 주인 아저씨 옆에 있는 걸 보았으니 집냥이가 맞겠지? 하며 고양이만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었다. 귀.여.워. 내 품안에 있는게 귀엽긴 한데 점차 팔이 저려 최대한 조심스레 팔을 꺼내어 폰을 보고 있는데 녀석이 깼다. 갑자기 내 니트 소매를 물더니 내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놓지를 않는 것이다. 순간 무서웠다.

내 품에 안겨 복싱자세로 잠든 길냥이

애를 억지로 떼내고 나니 이제 나도 좀 푹 쉬고 싶었다. 길냥인지 집냥인지도 모를 애와 연신 코만 골아대는 남자 사이에서 도무지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결국 고양이에게 겁을 주며 쫓아 보내려 했지만 이 녀석. 역시 내가 무섭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 꿈적도 안 한다. 내가 쫓아보내려는 시늉을 하니 눈치를 챘는지 이제 부엌으로 가 자리를 잡고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결국 주인집 아저씨께 말씀드려 내쫓았고.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이 상황이 너무 신기해 Chat GPT 에게 물어보니 묘연 이란다. 고양이와의 인연. 고양이가 나를 집사로 택한 것 이라고. 이 정도로 나에게 엥기고 편안해 했다면 내일도 찾아올지 모른다고. 무슨 나는 내일 새벽이면 다시 체크아웃이다. 피츠로이 일출 등반은 새벽 세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막상 내쫓고 나니 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떠오르며 내가 과했나 걍 같이 지낼까 싶다가도. 만일 걔가 길냥이면 진드기를 조심해야된다던 Chat GPT 의 조언에 약간 집집하기도 했던. 그렇게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두 세시쯤 깨어 등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다 새벽의 바깥 풍경이 궁금해 블라인드를 열었는데 왠 걸. 창문 바로 앞에 고양이가 있었다. 힝..사실 나도 너가 그리웠는데 다시 나를 찾아온 거니? ㅠㅠ 보자마자 창문을 열어주었다. 자기 집마냥 성큼 들어오던 녀석. 집냥인줄 알았는데 이 녀석 길냥이었나보다. 에고 얼마나 추웠을꼬. 어차피 우린 나갈거니 우리 침대에서 쉬거라. 이불도 포옥 씌워주었다. 귀여운 녀석. 빵 한 조각 떼어주니 먹더니 그 이상은 쳐다도 안 보았다. 고양이는 하루에 18시간을 잔다더니 얘는 이 집에 들어와서도 또 눈을 붙였다. 잘 있어라고 바이바이를 외치니 눈을 감은 채로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게 너무 귀여워 또 빠이빠이 하면 꼬리를 다시 흔들어댔다. 고양아. 네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맘이 몽글몽글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네가 생각나서 네 영상보며 엄마미소 짓다 돌아왔어. 이럴 때보면 정말 고양이가 사람보다 났다. 개냥이가 이런 건가 보다. 나한테 안겨서 재롱부리던 모습이 잊히지가 않는다. 이게 뭐라고 이리도 빨리 정이 붙을 일인가.

침대에서 꿀잠 주무시는 중

힘들어도 웃으라고 너가 왔나보다.

고맙다 내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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