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930, 토스 Lv 07.
7년을 글로벌영업팀에서 근무했지만, 영어회화가 불가한 이슈로 국내고객 대상 업무만 했다.
입사하고 수많은 교포와 해외대 출신 들을 보며 영어울렁증이 생겨 영어가 더 입 밖으로 안 나왔다. 그런데, 이직처도 글로벌 세일즈 부서였다. 심지어 담당 임원이 호주 교포 분이셨다.
급박했다. 한 달 안에 어떻게 쉬면서 영어 실력도 키울 수 있을까?
하와이에서 한 달 살기만 하면 저절로 귀와 입이 트일까? 근데 혼자 가면 한 달은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대안책을 찾았다. 바로 하와이에는 비싼 단기 어학원이 많다는 것. 프로그램에 숙소도 포함되어 있어 와이키키에서 외국학생들과 룸쉐어를 하며 좀 더 싸게 지낼 수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영어도 트이고, 돈도 절약하는 베스트 옵션이 아니겠는가. 바로 결제부터 진행했다.
2024년 11월 8일 금요일 퇴사하고 삼각지에서 불금, 토요일에 은행원과 소개팅 한 건, 일요일 점심에 소개팅 또 다른 한 건까지 마무리 후 바로 공항버스를 탔다. 파워J만 소화할 수 있는 초단위 스케줄. 몸은 힘겨워도 마음은 즐거웠다.
11월 10일 20시 20분 비행기를 타고 떠났는데, 11월 10일 오전 9시 30분에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하와이와 서울은 시차가 19시간 이다. 왠지 하루를 더 번 것 같은 기분.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우버를 불러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유럽소녀 3명과 같은 방을 쓴다고 들었는데 내 룸메인 Anja가 방에 있었다. 착하게도 내가 첫 날이라 친구가 없어 본인의 스케줄에 데려가 주었다.
아뿔싸, 그런데 내가 떠나기 전 네이버 블로그에서 봤던 어학원 후기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하와이에 가면 80%가 영어를 못하는 일본인 이고, 20%가 스위스 사람이라 했는데 아니었다. 80%가 스위스 사람이었다. 사실 나 말고는 아시안이 거의 없어 놀라우면서도 좋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Anja는 어학원에서 제일 고급반인 영어를 잘 하는 스위스 친구였으나, 같이 놀러다닌 그녀의 친구는 영어를 하지 못해 거의 소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와이 입국 첫 날 깨달았다. 언어가 안 돼도 '느낌 아니까'. 느낌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입국 다음 날이 어학원 OT 였다. 같은 날 등록한 친구들과 OT가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며 다 같이 하와이 시내를 구경했다. 20대 초중반의 유럽 아가야들만 있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히 독일 아저씨 한 명, 스위스 아줌마 한 명도 같은 팀이었다. 내 나이가 중간 값인 느낌?
초록초록한 공원과 야자수, 넘치는 여유,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일몰, 다양한 인종/국가/나이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경험 모든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 날은 몰랐다. 내가 그렇게 까지 영어를 못하는지. 그저 쉴새없이 영어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들도 뭐라고 말하는지 대충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하와이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는 얼마가지 못 했다.
어학원 친구들 또한 나처럼 모두 혼자 온 여행객이자 학생들 이었다. 그래서 모두 함께 다같이 모여 다녔다. 외롭지 않게.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며 학원 액티비티도 같이 신청하고, 휴강 시간 및 학원이 끝난 이후에도 관광/식사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나의 가짜 E력은 오래가지 못 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계속 써야 했고, 동행자들 중 일부는 유럽식 억양이 강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피로감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게다가 11-12월의 하와이는 생각보다 추웠다. 내가 도착한 그 주가 특히 강풍이 불고 비가 오락가락 하며 날씨가 좋지 않았고, 시차적응도 하기 전에 감기부터 걸렸다. 가뜩이나 불편한 영어소통과 하루종일 친구들과 붙어 다니는 게 피곤하던 찰나, 숙소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근데 이게 웬 걸 안방을 쓰는 20대 초반의 프랑스 소녀들이 밤만 되면 담배를 피며 깔깔 거리는데, 문신도 많고 제정신이 아니어 보여서 너무 무서웠다. 7년을 글로벌영업팀에서 근무했지만 해외 거주경험이 전무했던 터라 모든 새로운 환경이 스트레스 였다.
7년 만에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보다 영어를 더 못 했고, 생각보다 글로벌한 마인드 따위는 더 없었다.
그저 문신하고 담배피는 어린 유럽 소녀들에게 헤꼬지를 당할까 벌벌 떨며 보내는 하루하루 였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았다. 엄마, 아빠 돈으로 비싼 하와이 어학원을 장기로 다니는 유럽 소녀들은 나보다 훨씬 부자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여권이며 현금이며 침대와 탁상 위에 대충 던져놓고 다녔다. 그 이후로 나의 진짜 하와이 라이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