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입국 첫날, 내 룸메 Anja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Fort DeRussy Beach Park로 나를 데려갔다. 이곳이 와이키키 보다 조금 덜 붐벼서 Chilling 하기 좋은 장소라고 했다. 그렇게 룸메와 룸메친구 셋이서 모래사장에서 쉬고 있는데 오렌지색 비키니를 입은 언니인지 동생인지 모를 사람이 비치 발리볼 쪽수 채우러 오라고 초대했다.
안 그래도 그 섹시한 여성 두 분의 비치 발리볼 게임을 몰래 구경하고 있던 터였는데, 그녀들의 적극적인 구애에 우리 셋 다 동원되었다. 그날이 내 인생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일 비치 발리볼 게임이었다. 그래도 나름 운동신경은 있어 중학생 때 배구 좀 하는 편이었는데, 막상 실전에 투입되니 영 볼품없었다. 같은 팀원들에게 너무 민폐되는 게 미안해서 공이나 냅다 주워주기 바빴다.
그러나 오렌지색 비키니를 입은 섹시한 언니? 섹시하고 운동 잘하니까 그냥 다 언니인 걸로.
지치지도 않고 뙤약볕 아래에서 두세 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계속 게임을 하였다. 결국, 우리 패밀리는 기권을 하고 빠져나왔고 그 이후, 그 언니들은 핫 가이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가 나간 판은 핫 가이들이 합류되며 거의 프로급 게임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우리 패밀리들은 그저 선글라스를 끼고 핫 가이들 중 누가 본인들의 타입인지 떠들고 있었는데, 오렌지색 비키니 언니가 또다시 나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마침, 나도 핫해진 경기에 다시 조인하고 싶은 마음은 들었으나 나의 열정 대비 실력이 형편없어 구경만 하고 있을 때였다. 꾸역꾸역 핫한 언니들을 따라가서 경기 참가는 극구 사양하고 좀 더 가까이에서 프로급 경기를 구경했다.
약간 심심해지려던 찰나, 경기 중 잠시 쉬러 나온 핫 가이가 "What's your name?" 이라며 말을 걸어주었다. 잠시 초라해질 뻔했던 나에게 던져준 관심이 너무 감사해 나도 이것저것 물어보다 그의 인스타 아이디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본토 서부에 살고 있고, 하와이에는 남동생이 살고 있어 휴가 차 방문했다길래 아주 이상한 놈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에서였다. 그렇게 DM으로 Grant라는 핫가이와 연락을 주고받다, 오렌지색 비키니녀들과 한탕 달리고 죽었는지 연락이 사라졌다.
하루인가 이틀 이후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고, 우리는 왓츠앱으로 이동해서 좀 더 편히 연락했다. 운 좋게도 그의 동생집과 나의 레지던스가 가까워 그가 오토바이를 대여해서 타고 오면 1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번개로 레지던스 근처 올드 펍에서 만났다. 밤늦은 시간이고 어쨌든 한 번 본 외국인이라 긴장하며 나갔는데, 웬걸 엄청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하와이에 오게 된 이유와 어떤 일을 하는지 등등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나를 엄청 재미있어했다. 물론, 가끔 나는 그의 영어를 다 알아듣지 못하고, 그도 나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결국엔 서로의 의사전달이 다 되었다.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2차로 이동하려 했지만 하와이도 역시 늦게까지 여는 술집이 없었다.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서 와이키키 해변에 가려 했지만 이미 편의점들도 문을 다 닫은 상태였다.
숙소에 들러서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도쿠리를 들고 나오네 마네 고민하다 결국 우리는 아쉽게 헤어졌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근데 번개로 다음 날 우린 또 만났다. 내가 학원 친구들 무리와 일찍 헤어져 저녁시간이 비었고, 집에 가는 길에 그에게 급하게 번개를 쳤는데 마침 시간이 된다고 했다. 나는 야무지게 한국에서 챙겨 온 참이슬 도꾸리와 소주 종이컵을 챙겨나갔고, Grant는 나에게 가장 유명한 포케 집에 데려가주었다.
소주가 너무 쓰다는 그를 위해 나는 하와이표 오렌지 주스도 함께 챙겨가 포케 집에서 참이슬+오렌지 주스를 섞어 타주었다. 그렇게 퀵하게 도쿠리 한 병 끝내고, ABC 마트에서 참이슬 1병, 참이슬 딸기맛 2병을 더 사서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했다. 원래 와이키키 해변에서 음주는 불법이라 걸리면 300달러이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마시면 잘 안 걸린다고 거의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Grant 가 팁을 주었다.
와이키키 해변을 안주삼아, 실은 조금 남은 포케를 안주삼아 한잔 두 잔 홀짝홀짝하다 보니 우리는 만취했고, 또 술이 부족했으나 문을 연 곳은 없었다. 그렇게 Grant가 안전히 레지던스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너무 아쉬운 나머지 만취한 상태로 더 놀고 싶다고 추태를 부렸다. 아무래도 나는 미친놈이 맞는 것 같다. 너무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며.. 아마 그놈이 나보다 다섯 살은 어렸던 것 같은데..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는 잠수를 탔다.
그 뒤로 혼자 본토 연하남과 썸을 탄다고 착각하고 있던 나는 심적 대혼돈의 Chaos를 겪고 우울해지기 시작하는데... 역시, 서울에서도 하와이에서도 문제는 남자야..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