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을 모르는 자.
그 어디에서도 행복하지 못하리.
모레노 빙하 투어.
하루 8시간 일정에 50만원 정도 뽑아 먹는 굉장히 비싼 투어다. 그래도 다들 생에 언제 빙하에 직접 올라 서 보겠나 하는 마음으로 돈을 아끼지 않는다. 나도 2명 분으로 90만원 좀 넘게 결제하며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아르헨티나에 가기 전부터 젤 기대했던 투어였다. 그러나 Bryan 은 전일 피츠로이 트레일을 12시간 넘게 등산하며 거의 전사했고 나홀로 참가했다. 투어 직원은 이 비싼 투어에 친구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아해 했고. 어제 피츠로이 등산해서 휴식이 더 필요하다 하니 즉각 알겠단다. 초호화 투어 답게 벤츠 투어차량에 최신 보트를 타고 빙하로 향한다. 아시안은 없고 죄다 코큰 서양인 커플 들이다. 부부인지 그냥 커플인지 모르겠으나 빙하 한 가운 데에서 키갈을 날리며 그들만의 세상을 보내고 있는 그들을 보고있자니. 부부가 아닌가..? 뭐가 저리 좋을까 진심어린 의문이 든다. 그와 동시에 내 짝은 어딨나 마음 한 켠이 더 헛헛해진다. 소름끼치게 빙하 한 가운데에서 떠오른 사람은 내 옛 전남친.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줬던 사람. 문뜩 그와 같이 장을 보고 카레를 요리해먹으며 쉬던 시간들이 행복했는데..빙하보러 지구 반대편까지 날라와서 떠오른 게 전남친과 카레 만들어 먹던 날들이라니. 그렇다. 내 눈앞에 제아무리 세계 3대 빙하니.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얼씬거려도 행복하지 않았다. 약간 놀랍긴 하지만 그 뿐. 그럼 당연히 드는 의문. 난 대체 어디서 뭘 해야 행복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와 같이 밥 먹고 누워 넷플릭스 보며 평온히 잠들던 날들. 내가 잠든 줄 알고 머리를 쓰담으며 이마에 해주던 따스한 키스. 내가 사자머리를 하고 눈꼽을 달고 일어나도 귀엽다며 달려와 뽀뽀해주던 아침. 그 때가 행복했다. 지나고보니. 그 당시엔 몰랐지만.
그와 계속 함께 했다면
행복을 좇아 이 지구 반대편 까지 오지 않았을까?
아니 그 땐 몰랐다. 그와 함께 있을 땐 그게 행복인지 몰랐다. 도돌이표 같은 하루하루가. 매일 누워 넷플릭스 보는 일상이 지겨워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때도 그에게 매일 보챘다. 놀러가자. 제주도 가자. 펜션 가자. 어디라도 다니지 않으면 갑갑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화도 냈다. 넌 어떻게 하루 종일 누워만 있냐고. 영감이랑 있는 것 같다고. 전 여친들과도 이런 식이었냐고. 나는 늘 그렇게. 한결같이 현재에 만족할 줄 몰랐다. 그게 만들어주던 카레. 같이 상차려 먹던 불고기. 아홉시쯤 되면 그의 품에 안겨 잠들던 소중한 일상들. 말도 안되게 빙하투어에서 그 순간들이 떠오르며.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선 곧장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미친놈. 그래서 이런 유행가가 있나 보다.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나는 그에게 차이자마자 후회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다시는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던 그와의 추억이 갑분 지구 반대편에서 빙하투어 하다 떠오르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코쟁이 커플들 사이에서 나만 솔로였기 때문일까? 체구만 크지 하나도 통하는 것이 없는 사람과 이 먼 곳까지 여행을 와서일까? 그러나 문제는 그 때도 지금도 나는 만족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족이라는 걸 모르는 인간인걸까. 이렇게도 나는 늘 나 자신을 못 살게 군다. 만족을 몰라서. 지나고 보니 비싼 빙하투어보다 나의 엑스가 만들어준 카레를 먹고 넷플릭스 보던 나날들이 행복했던 날들이구나 싶다.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만.
그렇게 대자연 앞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자취 12년 차. 혼자하는 게 되려 편하고 익숙해지기도 한 터라. 씩씩하게 빙하 트레킹을 마치고 커피 한 잔 하며 점심 시간 칠링도 잘 마무리. 빙하 국립공원 까지 야무지게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머리로는 계속 전 남친을 떠올리며. 엘 칼라파테 지역은 양고기가 유명하단다. 숙소에 돌아가면 자쿠지로 언 몸을 싸악 녹이고 양고기에 레드 와인 한 잔을 해야겠거니. 그렇게 Bryan과 가볍게 한 잔 하며 얘기도 나누고 못 다한 속풀이를 서로 해야겠다 하던 찰나. 그렇게 피곤하다던 그는 대낮부터 바에 들러 위스키를 까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제발 취하지 말어라...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며 재밌게 보내자. 아뿔싸. 수영과 스파로 힐링하고 저녁 먹으러 가려는데. 그는 배가 안 고프다며 자기와 한 잔 같이 하자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여 취했느냐 물으니 취했단다. 자기 하루종일 울면서 혼자 반성했다고. 왜 저러는 걸까? 울면 뭐가 달라지나. 앞으로 남은 여행 잘 보낼 생각을 해야지. 너무나도 T 스러운 생각에 나도 내 자신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의 취한 모습을 보기 싫다 했고. 혼자 시간을 보내라 했다. 그러곤 걱정이 되어 저녁 먹기 전 호텔 바에 잠시 들렀는데. 상태가 괜찮으면 그를 데리고 나와 맛있는 걸 먹일 참 이었다. 근데 아놔. 만취해서 눈은 풀려있고 혼자 우울증 걸린 사람 마냥 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바 직원들도 이상하게 보는 눈치. 괜히 저러다 나한테 해꼬지 할까 싶어 도망가고 싶었으나 말은 걸어 보았다. 다짜고짜 옆에 앉으라길래 밥 먹으러 갈거라 하니 그는 호텔로 돌아간단다. 그래그래. 나는 미리 찾아둔 양고기 집으로 향하다. 늦은 밤 혼자 다니는 것이 약간 무서워져 그냥 가는 길 아무 레스토랑에 들렀다. 아놔 아무 레스토랑에 들렀는데도 스테이크 맛이 미쳤다. 나무 막대기 만한 프렌치 프라이와 스테이크를 싹싹 다 비워내고 안전히 호텔로 귀가하여 바에 가서 한 잔 더 하였다. 여기 사람들은 와인 한 잔도 가득 채워 줘 1-2잔만 마시면 술 기운이 얼큰히 올라왔다. 혼자 하는 2차는 아이스크림에 화이트 와인으로 마무리 하고 숙소에서 푹 쉬었다. 잠들기 전 호텔 로비에다 다음 날 새벽 공항으로 가는 택시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고. 후..취해도 스케줄 다챙기는 내 자신 이제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