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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Jul 21. 2020

항우울제, 항불안제, 그리고 수면제

우울&불안장애 치료기 (2)

첫 상담을 마치고 약을 받아서 나왔다. 나무위키에도 나와 있듯이 (그렇다 정신건강의학과를 가기 전에 나무위키에 있는 우울증 항목을 아주 자세히 보았다), 정신건강의학 부분은 의약분업이 되지 않아서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을 을 수 있다. 아마 신변보호를 위해서일 것이다.


약은 일단 일주일치를 받았다. 다음 주에 다시 와서 약효과가 있었는지 보자고 하였다. 일주일치지만 약이 한 봉지 가득이었다. 약에 대해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아주 자세히 잘 설명해 주었다. 낮에 먹는 약 3 봉지와 밤에 먹는 약 1 봉지, 그리고 자기 전에 먹는 수면제가 1 봉지 있었다. 약은 5 봉지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낮에 먹는 약은 불안을 완화해준다고 했다. 먹으면 30분 안에 약효가 나타난다고 했다. TV에 보면 힘들 때 약을 먹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약을 먹는 거였다. 효과는 6시간 정도 지속된다고 한다. 6시간마다 알람을 맞춰두었다. 그리고 저녁식사 후에는 항우울제를 추가로 먹고 자기 전 30분 전에 수면제를 먹어야 한다. 소화기능에 이상이 있을 수 있어 소화가 잘되는 성분이 들어있는 약도 함께 있다고 했다.


시간 맞춰 약을 먹는 건 생각보다 낭만적이었다 (이렇게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나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워낙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어 코피도 한번 흘려본 적 없고 병원에 입원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약도 먹고 병원도 자주 온다는 것은 뭐랄까, 황순원의 소나기 속 주인공 같다고 느껴졌다. 작가들 중에 신경정신과 장애를 앓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어찌 되었든 우울 및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약을 잘 챙겨 먹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첫 질문은 항상 같았다.


"약은 잘 챙겨 먹었나요?"
Photo by Christina Victoria Craft on Unsplash


약을 먹은 첫날도 둘째 날도 그 다음날도 특별히 뭔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 않았다. 기분도 의욕도 예전과 같았다. 여전히 메일이 오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리고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도 같았다. 다만 수면제로 인해 잠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 건 아주 좋았다. 하지만 자는 중간에 깨는 건 여전했다. 그래도 잠들지 못해 뒤척거리는 것보다 중간에 잠시 깨었다 다시 자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언제 잠드는지도 모르게 누우면 정신이 저 멀리 아득한 곳을 밀려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한밤중이었다. 아이는 곁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고 방은 고요했다. 다시 잠을 청했다. 언제 잠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잠이 깬다. 머리가 좀 아팠다. 근 몇 년간 개운하게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비타민보다 많이 먹는 타이레놀을 한 알 먹었다. 너무 아픈 걸 참지 말라고 타이레놀 ER을 잔뜩 챙겨주던 친구 아버지인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그리고 안 그래도 식욕이 없었는데 약을 먹으며 소화가 전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샌드위치 1/4도 못 먹었다. 밥도 한수저 뜨다가 말았다. 커피와 탄산수만 마셨다. 몸무게가 더 줄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몸무게가 줄어가는 게 나는 좋았다. 맞지 않던 청바지가 들어가서 좋았다. 팔뚝이 가늘어져서 좋았다. 정상이면서 정상이 아니었다.


아직 증상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우울&불안장애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나에게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excuse (한국말로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 핑계도 아니고 변명도 아니고)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한없이 늘어지던 학위논문과 저널 논문의 delay에 대해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 교수님도 나의 상태에 대해 인지하고 도움을 주셨다. 같이 일하는 동료 대학원생 한 명에게만 이 일을 이야기했다. 고마운 그녀는 흔쾌히 도움을 주었다. 특히 랩 세미나를 할 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전혀 조리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어눌하게 이야기하면 그동안 좀 당혹스러워하던 교수님도 이제는 대충 말을 돌려가며 마무리를 해주셨다. 그리고 자책하는 나를 함께 질책하지 않아 주셨다. 여전히 새벽에 오는 이메일을 보면 그날 잠은 다 잔 듯 잠이 오지 않고, 새벽형 인간인 교수님은 새벽에 메일을 주로 보내곤 하셨다. 하지만 그동안은 답을 하려고 일어났다면 이제는 일어나지 않기로 했다. 아침이 되면 혹은 오후가 되면 답을 하기로 했다. 심장이 덜 두근거렸다. 내년 이맘때즘이면 모든 일이 다 끝나 있을까. 그동안은 창문으로 뛰어내릴 생각만 했는데 처음으로 논문 심사를 연기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언제나 쿵쿵 내려앉던 심장 소리가 아주 조금은 작아진 것 같았다.




*2019년 6월 시작된 치료 일기입니다. 현재도 치료 중이지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나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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