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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하니 Oct 25. 2019

쟤 진짜 부자인가 봐!

늘은 냉장고 정리를 했다. 언제 산지도 모르겠는 당근이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한때는 싱싱했던 당근을 버리며 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교 기숙사에 살거나 자취를 하는 이곳 친구들은 대부분 냉장고 없이 지낸다. 냉장고가 없는 삶.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다. 생각해 보면 냉장고는 태어난 이래로 한평생 없었던 적이 없었기에 늘 내게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에서도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먹는 시원한 수박은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인데… 수박은 차치하고서라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달구어진 뜨끈한 물을 마시는 건… 오 마이 갓. 살려주세요. 생각만 해도 너무 덥다.


그런데 40도는 우습게 넘기는 이곳 샨티니케탄에서 냉장고 없이 몇 년씩 살고 있는 친구들. 이 친구들은 매일매일 그날 요리해서 먹고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소량의 채소만을 사서 먹는다.

부엌에 와서 남은 음식을 기다리는 거리의 소


 나처럼 냉장고를 믿고 내일 먹을 것까지 생각해서 이것저것 사서 미리 쟁여놓다가 냉장고에서 미라가 된 음식물을 발견할 일이란 없다. 늘 싱싱한 채소를 그때그때 먹고 끝낸다.


 그들처럼 냉장고도 없이 사는 친구들도 있는 반면 현재 이곳에 지내는 한국인 5명은 모두 에어컨을 가지고 있다.

방 불과 천장의 선풍기 스위치

나도 이번 해 2월, 참다 참다 작은 에어컨을 하나 장만했다. 샨티니케탄에서 지낸 약 2년간을 에어컨 없이 버텨보려 정말 부단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40도가 넘어가던 어느 한 밤중에 발가벗은 채로 물에 적신 수건을 덮고 선풍기 바람을 쐬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물을 펑펑 흘리고는 에어컨을 사고야 말았다. 지금은 어떻게 이 더위에 에어컨 없이 살아왔나 싶다. 근데 신기하게 다들 산다. 정말 이건 없으면 안 돼! 해도 없으면 없는 대로 잘 꾸려서 들 산다. (엄지손가락 만 한 바퀴벌레, 꼬리만 봐도 놀라 자빠지는 쥐가 나오는 후덥지근한 방에서..!)


 어떤 학생은 아이폰에 맥북에 아이패드까지 쓰는데,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친구는 작은 흑백 화면과 키패드가 하나로 되어있는 노키아 2G 핸드폰을 쓰고 있다. 아니, 아예 핸드폰 자체가 없는 친구도 있다. 핸드폰 없이 어찌 저리 잘 살지? 핸드폰이 없으면 간단한 사이트 하나 가입도 못하는 곳에서 자라온 나로서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길에서 밥도 먹고 씻기도 하고. 이곳의 길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체성을 바꾼다

정말 이곳에서는 모두가 천차만별로 살아간다. 정형화된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 없다. 심지어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숲에서 사는 그리스인 학생도 있으니.


세 평 정도 되는 허름한 집(한 달 렌탈비가 5만 원 정도)에서 살던 태국 친구가 생각난다. 이 친구는 2만 원을 주고 중고로 산 냉장고를 쓰고 있었는데, 냉장고 본체와 문의 연결 부분이 부서져 있어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매번 문을 통째로 떼어 들고 벽에 기대어 놓아야 했다. 매일 그러면 불편할 법도 할 텐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에도 열댓 번씩 문짝을 떼었다 붙였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일이었다. 심지어 이 친구의 직업이 셰프였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이 친구의 초대로 태국을 가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인도에서는 4년을 넘게 바퀴벌레와 쥐가 득실거리는 허름하고 작은 집에서 살던 친구가 방콕 부촌에 있는 커다란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완전 사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기분이었다.


"너 왜 그동안 돈이 없는 척했어?! "


돈이 없는 친구인 줄 알고 나도 없는 돈에 더치페이할 때면 그를 위해 500원 1000원씩이라도 더 냈기에 황당한 마음에 흥분한 채 물어봤다.


"나는 그냥 인도에 갔으니까 다른 인도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려 했던 것뿐인데, 그게 왜 없는 척한 거야? 뭐가 잘못된 거야? "


“이런, 그래… 네 말이 맞네….”


"그러는 너희는? 늘 너넨, 한국에서 살던 그 편한 것들을 인도에서도 그대로 누리려고 하잖아."


이곳에서 지내는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거실과 방, 부엌, 발코니가 따로 분리된 비교적 깨끗하고 큰 집을 빌려 지낸다. 집을 통째로 빌려도 한 달 렌탈비가 10만 원에서 15만 원 사이. 른 친구들이 보면 한국 학생들이 돈이 많아 사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가 공부하는 인도 국립대학인 Visva Bharati University는 인도 내의 다른 대학보다도 훨씬 저렴한 학비로 여기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의 경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오히려 한국에서 못 누려 본 것들을 저렴한 가격에 누릴 수 있으니까 더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하는 거지, 돈이 엄청 많아서 사치를 하는 게 아니다. 15만 원이면 제대로 된 방 한 칸 구하기도 힘든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오던 우리로서는 언제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살아보나 하는 마음에 다른 집보다 조금 비싼 렌탈비가 부담이 되어도 큰 집에 살고자 하는 건데, 사정을 모르고 보면 저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떨어진 냉장고를 부여잡고 사는 친구를 보며, 에어컨이 딸린 살린 방에 사는 나를 보며 원치 않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만다. 모두에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음에도 우습게도 잘 모른 채로 서로 평가하게 된다.


이리도 멀쩡한 생각을 하면서도 며칠 전 나는 내가 사는 집보다 방 하나가 더 딸린 방 세 개(!) 짜리 대리석 바닥 집에서 혼자 사는 미국인 친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쟤 진짜 부자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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