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예능프로그램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촬영하고 있는 배우 이민정씨가 스페인 생활에서의 가장 어려운 점으로 시에스타(siesta) 때문에 늦어지는 퇴근 시간을 꼽는 것을 봤다. 지금은 종영한 또 다른 예능프로그램 '스페인 하숙' 에서도 4시가 넘어 고기가 떨어졌다는 것을 안 배우 배정남씨가 시에스타 때문에 곤욕을 겪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시에스타(Siesta)는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국가와 라틴 문화권의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낮잠을 자는 풍습을 일컫는데, 여름철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어가는 더운 나라에서 한낮의 휴식은 일의 능률을 높이고 원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하다고 한다.
그늘 하나 없는 거리를 맨발로 걷는 인도 여인
나도 이곳 인도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점 중 하나가 이 ‘낮잠 시간’이었기에 시에스타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 고생하는 이민정씨를 보며, 급한 식재료를 사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배정남씨의 모습을 보며 많이 공감을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현지 사람들이 낮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대체 왜 그곳에 지내는 외국인에게 ‘가장 어려운 점’까지 되는 것이지 의문을 가졌겠지만, 이곳에서 살아보니 이 낮잠 시간이라는 것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참 다양하게 힘든 상황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도에 유학을 오기 전에 인도에 오면 힘들 것 같은 부분들을 미리 챙겨 나름 준비를 해 왔지만, 낮잠 시간이라는 것은 아예 생각지 못 했다. 하긴, 만약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게 어떤 것인 줄 몰랐을 테니, 심각하게 어려운 점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 타고르가 세운 Visva Bharati University의 캠퍼스
2시 즈음이 되면 푹푹 찌는 더위에 가게들은 하나둘씩 창문을 닫고 셔터를 내린다. 낮잠 시간, 즉 시에스타의 시작. 이곳에 온 후 나에게 그놈의 낮잠 시간은 다양한 의미로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낮잠 시간은 보통 2시에서 5시 사이. 한국이면 점심식사 후에 한창 이것저것 부지런히 하고 있을 시간인데, 여기선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러 슈퍼에 가지도 못가고 급한 작업재료를 사러 화방에 가지도 못한다. 또 일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늦어져서 두시가 넘어가면, 어떤 곳에서도 점심을 먹을 수 없다. 심지어 학교 스튜디오도 다 문을 닫아서 작업을 하다 경비아저씨한테 쫓겨난 적도 있다. 아니 공부를 더 하겠다는데도 집에 돌아갔다가 5시에 다시 오라니. 거 되게 칼같이 낮잠시간을 지키시는 경비아저씨다. 이렇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집에 묶여있는 신세가 된다. 굳이 우겨가며 나가봤자 꽁꽁 닫힌 문들과 이글이글 불타는 텅 빈 도로만이 나를 반기는데, 이렇게 되면 정말 의미 없이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꼴이니 안 나가는 게 상책이다.
학교 캠퍼스에서 낮잠을 자는 거리의 개
처음에는 그 시간을 집에 반강제로 갇혀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2시에서 5시 사이.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땐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만나느라 바빴던 시간이었고 일을 할 시기에는 정신없이 주어진 업무를 해내느라 땀을 쏙 빼고 있던 시간이었다.
처음 며칠이야 먹고 자고 쉬는 게 편했지만 이 생활이 지속되자 금새 우울해졌다. 나는, 대낮에 집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잘 몰랐다. 바깥만큼 더운 집 안에서 딱히 할 거리는 많지 않았다. 사실 최고의 선택은 찌는 더위를 잊을 만큼 푹 자는 것이지만 대낮의 황금 같은 시간에 몇 시간씩 잔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편하지 않았고, 자고나도 찝찝함이 남았다. ‘점심 먹고 잠깐 잤더니 하루가 다 갔잖아... 내 아까운 하루. 아, 나 정말 한심하다. 이렇게 잠이나 자면서 하루를 다 보내버리다니...’ 내 자신이 너무 게으르게 느껴져서 자고 나면 마음이 더 불편했다.
집 옥상에서 보이는 풍경
그 시간을 밖에서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는데 바쁘게 쓰는 것이 훨씬 익숙했다. 나는 쉴 줄을 몰랐다. 주어진 일이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를 몰랐다. 나에게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때 그 권한을 자유로이 누릴 수 없었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 그 더위에 어떻게든 책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애썼고, 뭐 하나라도 더 해보려고 내 이름으로 된 디자인 브랜드도 만들고 인터넷 강의까지 들었다. 갑자기 삶에서 추가로 주어진 시간같이 느껴졌고, 조급한 마음에 그 시간을 닥치는 대로 뒤죽박죽 쓰다 보니 몸과 마음이 다 지쳤다. 돈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큰 돈을 얻으면 쓸 줄을 몰라 흥청망청 쓰다가 망하는 것처럼, 늘 시간에 쫓기고 시간이 없던 내가 갑자기 황금 보너스 같은 시간을 매일 얻으니 그걸 효율적으로 쓰지 못했다. 나는 의무적인 태도로 그 시간을 계속해서 무엇인가로 꽉꽉 채웠고, 그러다 보니 황당하게도 여유로운 나라 인도까지 와서 번아웃이 왔다. 우습게도, 번아웃이 오자 이번엔 또 번아웃에 대해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참... 이것도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다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낮잠시간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여기 친구들처럼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잠이 오면 자연스럽게 그냥 잠을 잤다. 억지로 커피를 마셔가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가며, 한국의 친구들과 나를 비교해 가며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았다. 죄책감 없이 그냥 편하게 잤다.
요즘의 나에게 낮잠 시간은 꿀과 같은 시간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되었지만, 걱정 없이 취하는 풍부한(?) 낮잠은 이곳의 무시무시한 더위가 한풀 꺾일 때쯤 에너지를 충전하고 일어나 다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갖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졌고 책 한 줄은 더 못 읽을지언정, 즐거운 눈으로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길거리에 놓여진 작은 테라코타 인형들
대학원에서 만난 한 언니가 생각난다. 언니는 한국에서 학부를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프랑스에서 5년을 유학하고 한국으로 대학원을 온 케이스였다. 하루는 언니가 프랑스 학교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세상 여유로운 프랑스 친구들이 늘 졸업 후를 걱정하고 있는 언니에게 “민혜, 그만 걱정해. 우리 나중에 뭐라도 하고 있겠지. 정 할 게 없으면 어딘가든 가서 벽화 그리는 일 하면 되지~” 하고 말했더란다. 이곳 인도 친구들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하곤 한다. “진정해. 넌 충분히 멋있고 대단한데, 왜 이렇게 조급하고 걱정이 많아! 굶어 죽지 않아 쉬엄쉬엄해! Chill out!”
물론 프랑스와 인도 그리고 우리나라는 여러 면으로 상황이 많이 다르다. 우리의 사회가 우리를 현재에 살게 하지 못하고 미래의 걱정 속에서 현재의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가게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낮잠 시간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 나는 그 대표주자가 아니었을까. 늘 쫓기듯이 살다 보니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어있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의 전쟁터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갈수록 여유로운 마음이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낮잠 자기를 통해 배우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