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선택하는 자아의 초상

설득 끝에서 다시 나를 선택하다

by 서린

제인 오스틴의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은

시대마다 다양하게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등장해 왔습니다.


독자들은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등

그녀의 대표작들을 통해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때로는 운명적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과 현실의 경계에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작품의 편차가 크지 않은, 일관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써낸 오스틴이지만

단 한 편, 최고의 작품을 꼽자면

저는 사후에 출간된 《설득》을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주인공 앤 엘리엇은 제인 오스틴이 창조한 그 어떤 인물보다도 깊이 있는 내면과 성숙한 시각을 가진 여성으로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은 고통과 감정의 결은

어떤 것이기에 이토록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요?


주인공 앤은 과거 깊이 사랑했던 남자

웬트워스의 청혼을 거절한 후

오랜 시간을 후회 속에서 보냅니다.


당시 웬트워스는 가진 것 없던 장교였고

그의 불확실한 미래는

앤에게 두려움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웬트워스는 훌륭한 군인으로 성장해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얻는 데 성공하고

달라진 그와 재회한 앤의 고통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나 앤이 과거 그를 선택했던 것은

그의 장래성 때문이 아닙니다.


앤이 그를 사랑했던 이유는

웬트워스가 성숙한 인간이었고

앤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아는

솔직하고 대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앤은 그의 내면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지위와 배경, 경제적 조건과 같은

시대적 현실은 두 사람을 가로막습니다.


결국 주변의 설득 끝에

앤은 웬트워스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을 전면으로 내세워

인물 내면의 변화를 세밀히 관찰합니다.


앤은 어머니를 여의고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감정적으로 올바른 조언을 해줄 이도 없이

외롭게 자라납니다.


그런 앤의 유일한 친구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레이디 러셀'이라는 인물로

그녀는 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합니다.

앤에게 그녀는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자 보호자였습니다.


그래서 봉건적 가치로 그녀가 웬트워스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앤은 의무감에 그녀에게 설득당하고 맙니다.


그러던 중 웬트워스의 가족인 크로프트 부부가 엘리엇 가의 영지인 캘린치 홀로 이사 오면서 앤의 세계는 넓어지게 됩니다.

해군들과 조우하며 다양한 인물상을 경험하게 되고 새로운 가치관을 배우게 것입니다.


앤은 크로프트 부인의

'우리 여성들도 남편들과 배를 타고 함께 항해할 수 있다'는 발언에 매우 감명을 받게 되고

관계의 평등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라임 해변에서의 루이자의 추락사건도

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웬트워스의 손을 잡고 계단을 뛰어내리겠다

고집을 부리던 루이자가 크게 넘어져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은 것입니다.


루이자의 사건으로 앤은

단호함이라는 덕목이 때로는

지나친 과단성으로 변할 수 있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파멸로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인식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

늘 강인함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는 첫 번째 청혼을 거절했던

자신의 신중함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수용은

앤이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데 전환점이 되어줍니다.


앤은 약혼녀를 잃은 윅 대령과의 대화에서

상처받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랑으로 인한 심적 고통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 없는 관찰자'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웬트워스가 편지글로 그의 진실한 마음을 전했을 때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그의 마음을 수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신뢰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나의 고통을 인정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한 때 저도 오랜 기간 수험생활에 매달렸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힘들다'는 표현조차 마음껏 할 수 없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면 가슴속의 응어리가 더 커질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앤이 말한 것처럼 슬픔을 조용히 견디고

인내하는 시간을 가지면

감정은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나는 정말 괴로웠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감정을 말하는 과정을 통해서

제 안에서 고통이 자리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 앞에서 종종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일수록, 그 해답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선택이 실패로 돌아오기도 하지요. 과거는 현재의 좌절과 겹쳐지며 우리 안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실패의 그림자는 우리를 멈추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샘솟게 하기도 합니다.

그 의지 속에 깃든 작지만 단단한 희망.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가장 따뜻한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용기가 진심을 따르라고 우리의 내면을 조용히 설득하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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