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생동감 있는 피부 표현과 깊이 있는 눈매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모나리자의 입매는 어둠 속에서 은근한 미소를 짓는 듯한 느낌을 주며 보는 이들에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런데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저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루머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의 주의를 이끈 이야기는 그림 속 여인이 사실은 여러 인물들을 혼합해서 만든 완성작이라는 가설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다시 보니, 저는 그 얼굴의 특징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극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이 작품은 초현실적인 형태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형태가 뭉그러진 이유미의 얼굴처럼 말입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유미'라는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야 합니다.
유미는 아무런 학위 없이 음대 교수로 취직했고 의사가 되었으며 결혼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은 남장을 하고 부잣집 여자와 결혼하는 기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유미의 인생은 형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태도 소리도 없는 공기 같은 인생을 이유미라는 인물은 살아왔던 것입니다.
미군부대 근처에서 양복점을 하는 아버지와 지체장애가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유미는 자연스럽게
부대 근처에서 일하는 윤락 여성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중 '로라'라는 여성은 유미를 매우 귀여워하며 자신의 집으로 유미를 초대하는 등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애인인 미군 소위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겠다던 로라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유미는 처참하게 살해당한 로라의 시신을 보게 되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상이 현실이라는 벽 앞에 무너지는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한 순간이었습니다. 감정표현이 거의 없다시피 한 집안에서 유미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합니다.
로라의 죽음 이후 유미는 음악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듯 피아노 교습에 매달립니다. 미군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인 필립스 부인은 독특한 교습법을 가진 선생님이었는데, 그것은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교습법이었습니다.
유미의 실력은 무시당하고 음대에도 입학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교습법은 유미의 거짓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음을 그리듯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내고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미의 인생에는 수많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필립스 부인의 악보들, 고등학교 시절 집착적으로 모으던 로맨스 소설집, 대학 학보사 학생기자로 일하던 경력, 그리고 여러가지 가짜 직업들.. 이 그림자를 관통하는 단어는 하나, 바로 환상입니다.
거짓은 유미 자신이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내면의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s여대 학생, 교수, 의사라는 직함만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고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환상을 제공하는 이유미만이 그들의 아내자격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유미의 남편들은 연주회에서 빛나던 피아니스트 아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던 교수 아내, 자신을 따스하게 위로해 주던 의사 아내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열광할수록 유미는 안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속이 텅 빈 인형과도 같았기 때문에 누구든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미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공기같이 배경 속에 스며들어 뒤섞입니다.
딱 한번 유미가 자신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로라와의 관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미는 그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여인이 자신의 욕망, 꿈, 이상을 말하는 순간 처참한 몰골로 죽임 당한다는 것을요. 어쩌면 로라의 환영은 내내 유미의 삶을 따라다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서랍 속에 잠들어있던 낡은 까르띠에 팔찌를 꺼내보았습니다. 이 팔찌는 가품으로 제가 어머니와 함께 동네 잡화점에서 구매한 것입니다. 하지만 가짜여도 저에게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이 팔찌에는 추억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유미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환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재능 없는 학생에게 용기를 심어주었고 아내인 진에게는 애인과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소설가인 화자에게는 새 영감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순간의 진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미의 거짓은 비록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릴 수는 있었습니다. 가짜 팔찌가 위안을 줄 수 있듯 그녀와 나눈 추억과 시간만이 줄 수 있는 회복이었습니다.
《친밀한 이방인》의 표지 속 여인은 얼굴이 없습니다. 마지막 장을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저는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찾아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그녀가 주는 거짓 위안에 기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보다 거짓이 더 따스하다 느끼는 순간을 인생에서 한 번 이상은 겪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가질 수 없던 가능성을 그 안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 가능성의 얼굴은 우리가 찾고 있던
내면의 친밀한 이방인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