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태워 만든 파괴의 그림
단절 없는 불길 속에서 타오르기를 반복하는 무간(無間)은 불교에서 의미하는 죄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옥입니다.
이 지옥은 단순히 형벌의 장소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천천히 의식을 파괴하는 내면의 심연으로 다가왔습니다. 죄를 자각하는 순간 인간은 그 정신적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 속 화가 요시히데는 평생 무간의 지옥을 살아간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지옥변'이라는 압도적인 작품을 완성하지만 그로 인해 죄의 고리에 갇히게 됩니다.
광기에 휩싸인 화공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리려 했던 것은 단지 지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가담했던 모두의 영혼이자, 이상 세계를 그리려 했던 예술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지옥변』의 작품적 특성 중 하나는 신뢰성이 다소 떨어지는 서술자를 내세워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점입니다. 서술자는 대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급 인부로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라기보다는 주변 인물에 가까워 직접적인 참여자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대신'으로 대표되는 귀족 계층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반면 화공 요시히데는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계급적 편견에 얽매인 시각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야기 속 끔찍한 진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며 회피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대신은 다소 외설적인 성적 욕망을 지닌 인물로 화공 요시히데의 딸에게 은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술자의 시각은 이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미화하며 독자에게 명확히 전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딸을 시녀로 들인 대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요시히데는 대신의 명령에 따라 문수보살을 그려낸 매우 아름다운 작품을 바칩니다. 작품을 받아 든 대신은 크게 만족하며 청이 있다면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요시히데가 딸을 물려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대신은 갑자기 얼굴을 바꾸며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다"라며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 사건은 대신이 요시히데에게 앙심을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후 벌어지는 지옥변의 비극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대신이 그를 불러 지옥의 풍경을 담은 병풍을 그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화공 요시히데는 본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그대로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전설 속 미녀나 왕의 얼굴을 그릴 때조차 지체 낮은 여인이나 죄인의 얼굴을 본떠 묘사했고, 무당이 굿을 하는 장엄한 순간에도 장면의 재현에 몰두했습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종종 성격파탄자로 여겨졌는데 저는 왠지 그가 매우 천진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많은 창작자들처럼 요시히데 역시 사회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에 몰두했을 뿐 세상의 규율이나 예절 같은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시히데는 갖가지 방법으로 지옥의 많은 모습을 묘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단 한 부분, 하늘에서 불타는 우차를 타고 떨어지는 여인의 모습만큼은 끝내 그려내지 못합니다. 사람이 불에 타는 바로 그 순간만은 어떤 수를 써도 재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작업이 막히자 요시히데는 당혹스러움에 빠지고 평소 꺼리던 대신을 찾아가 불에 타는 여인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괴이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긴 대신은 갑자기 즐거운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흔쾌히 수락합니다.
대신은 ‘설해의 처소’라는 음산한 공간에서 평소 자신이 타던 마차에 여인을 태운 모습을 요시히데에게 보여줍니다. 수레 속 여인의 모습을 본 요시히데는 절망에 휩싸여 딸에게 달려가지만 그 순간 대신은 마차에 불을 지핍니다.
수레가 타기 시작하는 그 순간 절망하던 요시히데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이 아름답다는 듯이 감상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죽어가는 딸의 모습이 아닌 자신이 완성할 그림의 영감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화마 속에서 그는 극한의 미를 목격합니다.
그렇게 병풍의 그림은 완성되고 요시히데는 자살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요시히데는 지옥의 형벌 속에서 딸이 부르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그림의 초안을 그리고 있던 시기였고 딸은 살아 있던 때였습니다.
저는 예술에 압도된 요시히데가 결국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림에 현혹되면서 그의 인간성은 점차 고갈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성의 말살은 지옥도의 병풍을 보는 이들에게도 전염이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를 밉게 생각한 사람도 병풍의 그림을 보면 침묵했고 입을 모아 명작이라 경탄합니다. 그 정도로 그의 그림은 윤리성을 망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윤리성의 망각이 이 작품의 테마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시히데는 분명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완성작이 존재하는데 그가 환상에 매몰된 어리석은 화공에 그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한 지옥의 모습일까요?
우리는 이 작품에서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사건을 들려주었습니다. 요시히데가 그린 지옥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그린 미의 세계는 윤리를 파괴하고 얻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재창조된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결국 지옥변은 그의 예술세계의 정점인 동시에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요시히데 자신, 그 자체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그림은 파멸과 함께 휘날리는 환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그리고자 했지만, 정작 그의 손안에 있던 것은 작게 떨어져 나온 불씨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그림과 삶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재와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떤 작품이 세상에 남고 또 어떤 작품은 잊히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 병풍 속의 그림은 후대에 기억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는 인간적인 삶과 고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술적으로 미완인 작품을 더 아름답다 생각합니다. 결함 속에 숨겨진 진심과 섬세한 진의가 완벽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술의 감동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끔 불완전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듯이 저마다의 흠결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이 작품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