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미궁 속에서 구원을 찾다

기억과 감정의 편린

by 서린


1년 전, 저는 새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집을 잘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은 생판 모르는 남의 집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문 앞에 붙어 있던 전단지를 보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호수는 맞았지만 동을 잘못 찾아갔던 것이죠. 지금도 가끔 바꿔 둔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문 앞에 3초쯤 멈춰 서 있곤 합니다.


이렇게 깜빡하는 순간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음식을 태우기도 합니다. 아침마다 휴대폰을 찾고 알람을 맞춰놓는 것도 종종 잊습니다.


이처럼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는 우리에게도 숨 막히도록 답답한 여백입니다. 그런데 그 빈자리에 '살인'이 놓여 있다면 어떨까요?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의 절망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일지 모릅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다 보면 마치 이야기를 거꾸로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일흔의 김병수는 과거의 기억은 또렷이 붙들고 있는 반면 1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는 몇십 년 전 두 차례의 뇌 수술을 받았고, 그 수술의 여파는 그의 내부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그의 마음이 열리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수술 이전의 그는 모든 것에 무감각했고 쉽게 짜증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술 이후에는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달라졌습니다. 비록 살인의 본능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본능이 주던 쾌감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깨닫습니다. 더 이상 '완벽한 살인'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결국 그는 살인을 ‘은퇴’하기에 이릅니다.


마지막 희생양이었던 ‘은희’의 부모를 죽인 뒤 그는 어린아이였던 은희를 양딸로 입양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매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은희는 그를 요양원에 모실 생각을 하게 되고 결혼할 남자라며 ‘박주태’라는 청년을 집에 데려옵니다. 하지만 그는 박주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박주태가 집에 오기 전에 접촉 사고로 그와 마주친 이후 그에게 자신과 같은 살인자의 피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마을에서는 여성을 노린 연쇄 살인이 벌어집니다. 김병수는 박주태가 범인일 것이라 확신하고 은희에게 그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하지만 은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서없는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이상해졌다고 친구에게 하소연합니다. 결국 김병수는 직접 박주태를 상대하기로 결심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은희는 끝내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사건 이후 경찰은 김병수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양아버지인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고 체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반부까지의 서사를 김병수의 진술과도 같은 서술에 의지해 작품을 읽어왔습니다. 하지만 은희의 죽음 이후 우리는 그가 서술자로서 신뢰성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은 오직 그의 과거 기억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과거의 기억조차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양딸로 입양해 키웠다는 은희는 그가 은희의 부모를 죽일 때 같이 죽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딸이라 믿고 의지해왔던 은희라는 인물은 사실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그를 돌보던 재가요양보호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듯했던 김병수가 왜 유독 은희에게 집착하며 그녀를 지키려 애썼던 걸까요?


아무래도 은희는 그에게 있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김병수라는 인물이 소통의 부재에 부딪히며 속으로는 많이 외로워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은희'를 보며 내가 가질 수도 있었던 평온하고 인간적인 삶을 느끼며 무너져 가는 기억을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매일 아침 은희를 본다'는 행위는 살인자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심리적 닻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의 시작과 끝에는 『금강경』의 구절이 등장합니다. 김병수는 금강경이 설파하는 ‘무아(無我)’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자아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을 내면 깊이 받아들입니다.


인을 멈춘 후 그는 극심한 자아의 혼란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려 애씁니다. 그는 문화센터에 다니며 시도 써보고 일상을 회복하려 노력하지만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감각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시를 강의하던 시인의 농담에는 웃을 수 있었지만 그의 시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쓴 시집을 억지로 강매하려는 출판사 직원에게는 깊은 환멸까지 느끼게 됩니다. 결국 그는 다시 금강경을 읽는 데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그가 바랐던 자기 구원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금강경의 구절처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경지에 도달하고 싶었습니다. 살인자의 과거를 떨쳐내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말했듯 그의 메마른 마음, 마치 사막과도 같은 그곳에는 미안함이나 안쓰러움 같은 감정이 자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경찰에 붙잡혀 오랜 취조를 받던 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마침내 모든 기억을 잃게 됩니다. 그가 원했던 대로 괴로움도, 괴로움을 해소하는 길도, 지혜도, 깨달음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가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집착의 깨달음이 아니라 끝없는 고독 속에서의 형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김병수는 시간을 두려워했습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며 모두가, 모든 것을 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이 망각이라는 형벌을 본인에게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그에게는 몇 차례의 자기 구원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가 문화센터에서 진실한 즐거움을 느꼈더라면, 시를 읽고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했었더라면, 그리고 문화센터에 근무하던 은희의 어머니를 쫓아가 죽이지 않았더라면 혼란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직시하고 자수를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생겨난 인간적인 마음을 감당하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했고 그 고통은 극한의 이기주의로 발현되어 기억을 잃거나 부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김병수라는 인물은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괘씸한 아이러니 그 자체인 듯합니다.




저 역시 진정한 자기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가 ‘자기’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어떤 상태인지조차 여전히 모른 채 한심한 중생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적어도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약해져서 차라리 망각하고 회피하는 길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회피의 끝자락에서 깊은 물음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지금 나는 괴로운가'. 이러한 질문들은 평온할 때 보다 고통스러울 때 더 진지하고 절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저는 불교 수행에서 갈라져 나온 '고요함 속에서 답이 나온다'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이 구절은 저에게 번뇌를 가라앉혀야 그 위에 떠오르는 진리를 꿰뚫을 수 있다는 통찰의 의미로 느꼈습니다. 집착과 분노라는 번뇌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자각의 힘을 되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읽은 금강경의 길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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