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살루 국립공원의 하늘 아래서 1박
시원한 물 속에서 수영하면서, 가이드 피터 아저씨 몰래 홀짝 홀짝 입술을 적셨더니 한결 살 것 같다. 이제는 다시 땡볕을 마주할 힘이 생긴 것 같아서 혼자 어푸어푸 거리던 수영도 접고 (사실 어푸어푸는 아니다. 평영은 그래도 영법 나쁘지 않아. 내 생각엔.) 나와서 몸을 말리고 다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곳 겨울 건기는 습하지 않아, 땡볕 아래 입던 옷을 다시 입는 느낌이 썩 불쾌하진 않다. 게다가 일단 아침부터 피할 수 없던 열기를 조금 덜어내서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타들어 가던 갈증도 조금은 가셨고. 그래서 다시 오늘 처음 보았던 갈색 여우 원숭이들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음 속으로 다시 더워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왠걸 마지막 수영을 끝으로 앞으로 더 걸을 길은 많지 않았다 협곡을 따라 조금더 숲길을 걷다보니 멀리 가지 안아 캠핑 사이트가 나온다. 캠핑 사이트에는 이미 짐 들어주시는 분들과 요리사가 도착해있다. 내 텐트도 미리 쳐주셨다. 텐트 안에는 내 슬리핑 백까지 세팅이 되어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의도치 않게 이곳에서 황제 트레킹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다 동행을 못 구해서다. 성수기 직전에 왔더니 배낭여행자들에게 각광을 받는다던 커다란 숙소에서는 텅 빈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했고, 가이드 비용 및 기타 포터와 요리사 비용을 분담할 다른 배낭여행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 한 사람에 가이드+포터+요리사를 썼으니 비용이 많이 나왔다. 게다가 이살루 국립공원은 가이드 없이는 들어갈 수 없어서 그리고 1박에는 반드시 포터와 요리사를 동반하게 되어(이게 규정인지는 모르겠다) 비용을 줄일 수가 없었다. 또 원낙 싼 물가에 적응하고 살고 있어서 그렇지, 응당한 인건비라고 생각하고 지역경제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면 과하다고도 할 수 없는 비용이었다. 혼자 감당한다는게 좀 그래서 그렇지.
아무튼,포터와 요리사 분들은 산을 건너오지 않고 더 낮은 지대 우회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엄청 힘든 길을 지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짐을 한통 안고 차로 없는 길을 건너 오는 일은 익숙해질 순 있어도 매번 고단하겠지. 하지만 남의 삶의 터전에 대한 감상은 그만하고, 종일 가이드를 해준 피터 아저씨와 이 날 저녁 식사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겠다.
이살루 트레킹에서 내가 내는 비용은 마다가스카르 기준으로 꽤 어마어마한 금액이기 때문에 숲속에서 하는 저녁식사라고 믿어지지 않게 훌륭한 음식이 나왔다. 막 도착해서는 어쨌든 마실 물이 아직 없어서, (캠핑장에서 추가로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 외에 사람이 없어서 구매를 하지 못했다) 내일치 물이라도 땡겨 마실까 하고 있었는데 (내가 왜 목 마른지는 앞선 글들을 확인해주길 부탁한다) 왠걸, 요리사 친구가 쿠키와 따뜻한 차를 내어온다. 심지어 커피를 마실 것인지 차를 마실 것인지 물어본다. 이 숲 속에서 나에게 그런 선택권을 주다니! 그것도 캠핑장 옆에 마련된 식탁에 테이블 보를 깔고 세팅까지 해서. 심지어 설탕까지 준비해 주었는데 달달한 차는 싫어서 차와 쿠키를 먹었는데. 자 이쯤이면 황제 트레킹 아닌가. (지리산 종주 때 거지같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바람에 불도 잘 안 붙는 장비를 가지고 밥 한다고 낑낑 대던게 생각나서)
그렇게 따스한 차를 몇모금 넘기는 갈증이 조금 가신다. 차를 한 포트를 다 마시고, 한 포트를 더 해준다고 해서 그것도 한 포트를 다 마시니 갈증에 대한 공포는 조금 사그러든다. 그러고 나니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기고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남반부 겨울, 6월의 마다가스카르에는 곧 해가 진다. 그리고는 술을 준다! 마을에서 빚은 럼주(마을에서는 사탕수수를 키웠다. 소득작물로도 키우고, 술 만들려고도 키운다고)에 오렌지 즙을 섞은 꽤 맛있는 접시 한 가득 땅콩과 함께 내온다. 좀 처량하긴 했지만 숲을 응시하며 마시는 술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쎄긴 했는데 마실만 하다. 한 병을 다 마시진 못했는데 이내 해가 떨어졌고(숲에서는 해가 금방 졌다. 정말 순식간에), 어둑해지는 가운데 아까 그 테이블에 밥을 내어준다. 캠핑장 내 옆 사이트에는 독일 단체 관광객들이 들어찬다. 고등학교 때 했던 제2외국어 덕택에 독일말이구나 정도는 알아들었다. 그들은 뭔가 분주히 앉아서 식사를 할 기세지만 나는 어두어지는 숲을 쳐다보면서 초가 로맨틱하게 켜진 테이블 앞에서 메인으로 나온 쌀과 닭고기 요리를 먹는다. 종일 고생해서 그런지 요리사 솜씨가 좋은지 썩 맛이 좋다. 하지만 혼자 먹는 뻘쭘함은 어쩔 수가 없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이번에는 디저트까지 내온다. 아니 이 숲속에서 코스요리라니. 나는 연신 감탄한다. 심지어 바나나에 뜨겁게 녹인 초코렛을 얹은 꽤나 고급스런 디저트다. 아 조금은 감동스러운데.
하지만 이날 밤의 하이라이트는 저녁 식사도 아니고, 피터 아저씨 그리고 요리사 친구와의 술자리. 아까 마시던 술이 조금 남았고, 자기들이 가져온 럼이 조금 더 있어서 피터 아저씨는 같이 한잔 하겠냐고 한다. 사실 밥 먹을때도 아저씨랑은 어떻게 먹냐고 물었더니 따로 먹는다했었다. 보니까 원래 가이드, 포터, 요리사 등하고 여행객은 식사는 같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저녁 식사는. 그런데 내가 혼자 와서 안쓰러워 보인건지 아저씨가 먼저 술 한잔 같이 하겠냐고 해서 너무 반가웠다. 종일 걷느라고 사실 피터 아저씨와 길게 대화를 한 건 아니어서, 어쩌면 마다가스카르 현지인하고의 제대로된 대화는 이게 처음이라 더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피터 아저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이쪽 지방 사람은 아니고 일 때문에 온 거라고 했다. 부족으로 보아도 이 쪽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라' 부족도 아니라고 했다. 사실 나는 잘 구별 못하는데, 피터 아저씨는 키도 큰 편이고 이 쪽 마다가스카르 서남부 쪽 사람들과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아저씨는 영어를 아주 잘 했는데, 독학으로 배운 것이라고 했다. 불어는 기본적으로 하므로 불어 가이드로 시작해서, 영어권 여행객들(주로 영국인)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들과 대화하고, 누군가 보내준 교재를 통해서 공부하고 한 게 전부라고 했다. 그런데 문법이나 어휘가 흠 잡을 데가 없다. 정말 이게 정규 교육 없이 독학으로 배워서 할 수 있는 영어란 말인가? 자기는 6남매 중에 둘째라고 했다. 그런데 큰 형이 돌아가셔서 자기가 온 가족을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성수기에는 여기서 가이드일을 하고 우기가 오면 원래 본가로 돌아가서 농사일을 거든다고 했다. 그래야 먹고 사는게 해결된다고 했다. 가이드 수입은 마다가스카르에선 꽤 괜찮은 편이지만, 여러 입을 다 먹여살리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후변화로) 강우량의 변화가 심해 과거에 2모작 이상을 하던 농사도 이제는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아저씨는 호기심도 많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첫 한국사람 손님이라고 했는데, 한국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특히 궁금해하던 것은 자기가 티비를 통해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은 일을 많이 해서 휴가도 잘 없고 아주 바쁘다던데 이렇게 휴가를 내서 오는 것이 일반적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니오 아저씨, 저도 제대하고 도로 학생이 되어서 어쩌다 보니 시간이 났어요.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 하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프랑스 관광객 말고도 영어를 하면 다양한 나라의 관광객을 받을 수 있어서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는 왠만하면 프랑스 관광객은 안 받으려고 한단다. 아직도 자기들이 식민지 통치 국가인 줄 알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고. 아마 우리하고 일본 관계하고 비슷할 것 같은데, 가이드를 해주면 겉으로 표는 내지 않지만 하대하는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가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면에서 차라리 영국 관광객들이 낫다고 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주로 마주치게 되는 관광객들 그룹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정도 순이라고 했고, 이따끔 중국인 관광객들이 온다고 했는데 자기는 그 중에서는 영국 관광객들이 선호되어서 영어를 더 열심히 한 것도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 관광객들은 와서 노는 게 지저분해서 싫다고도 했다. 와서도 주로 유흥 위주의 관광을 하는데 꼴보기 싫다고. 사실 아저씨 분석이 얼마나 정확한건지는 일방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난 잘 모르겠다. 다만 현지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어쨌든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그렇고 나서 생각해보니 첫날 숙소에서 만난 프랑스 노부부에게 내가 프랑스와 마다가스카르 관계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도 그 노부부(20년도 더 전에 마다가스카르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다 만나 결혼했다고 했었다)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한 때 식민지였고 현재도 경제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아무래도 관심이 더 가는 나라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마침 옆에 있던 숙소 식당에서 서빙해주던 직원분에게 조심스레 그래 요즘 마다가스카르 젊은이들은 프랑스를 어떻게 평가하냐고 물었고, 그 직원은 그저 수줍게 웃고 지나갔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이런 저련 이야기를 하다보니 해는 완전히 저서 아주 캄캄하다. 자리는 자기들이 정리한다고 이제 쉬라고 한다. 황제 트레킹 답게 나는 잘 차려는 식탁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고 일어나서 내 텐트로 왔다. 오전부터 시작된 갈증에 퍼질까 두려웠던 것에 비하면 아주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하루 마무리였다. 그렇게 텐트에 들어가서 에어매트를 깔고 슬리핑 백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별 것 없었지만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