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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벽 Jul 07. 2019

로스쿨일기: 커피

일상화된 커피 드링킹

일상화된 커피 드링킹은 기실, 모든 사무직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하겠다. 마치 이전 세대의 예술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른바 낭만적 폭음을 즐겼다고 하듯이 종일 앉아서 서류 작업을 해야 하는 직군의 대부분은 어떠한 형태로든 음료를 입에 달고 살 것이고 그 대부분은 커피가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종일 수업 듣고 공부하는 로스쿨도 예외는 아니라서 커피를 정말 입에 달고 살게 된다. 


0. 커피는 알지 못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에서는 커피를 못 마시게 하신 것도 있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어서 캔커피 외에는 입에도 대보지 않았고 너무 달짝지근한 캔커피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이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처음 찾아간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무엇을 시켜야 좋을지 몰라서 메뉴판 위에서부터 인원 수대로 이것저것 시켰다가 나온 에스프레소를 보고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나 낯선 음료였다, 커피는. 



1. 커피 입문

내가 처음 커피에 눈을 뜬 것은 아주 오래 전 학부 2학년 당시 (무려 2005년이다... 나이 인증해버렸네) 부산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담에서 약 2주간 통역 자원봉사를 했었을 때였다. 말이 거창해서 통역 자원봉사지 사실 벡스코나 동백섬 APEC 행사장 출입문 등등에서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해 APEC은 11월에 개최되었는데 부산은 원래 추운 도시가 아니라 겨울이라해도 눈도 잘 내림지 않음은 모두 잘 아실터이다. 그래서 11월이라고 해도 쌀쌀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나는 벡스코 회의장의 한 게이트에 배치받았는데 문 앞에 서서 해외 파견단 등 검문검색 관련 안내 통역을 해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건물 입구 문은 사람들이 수시로 돌아다녀 거의 상시적 개방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건물 외부에서 내부로 바람이 엄청 들어왔다. 그 바람을 서서 하루 종일 맞고 있으면 여기가 부산인가 싶을 정도로 매우 추웠다. 당시 회의 자원봉사자들에게는 가을 양복 같은 것을 유니폼으로 제공했는데 그것을 입고 종일 바람을 맞다 보니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너무 추웠다. 


다행히도 통역 자원봉사자들도 각국 파견단이 쓰는 휴게공간을 같이 쓸 수 있도록 해주었었는데 당시에는 국가적 행사라고 해서 지원이 매우 좋아서 파견단 휴게공간에는 인근 신라호텔에서 공급하는 커피와 차, 다과 등이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눈치 안 보고 마구 갖다 먹어도 되게. 대학교 2학년생에게는 꽤 그럴싸한 호사라고 할 수 있었고, 그 전까지는 커피 맛도 모르던 나도 일단 얼은 몸을 얼리기 위하여 따뜻한 음료를 찾아서 커피 드링킹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아메리카노만, 그러다가 같이 비치된 우유도 타 마셔 보고. 그렇게 2주 정도 생활을 해보니 커피가 입에 좀 익었던 것 같다. 심지어 나중에는 맛도 있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그때를 계기로 나는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2. 중독의 길로 

그 뒤로 한국에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학부생들도 친구들과 모임을 카페 같은 곳에서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다들 커피를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간혹 허세 섞인 마음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일부러 에스프레소를 시켜 먹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 가장 싸고 부담 없는 아메리카노를 잘 먹었고, 학교 앞 아직 북유럽풍 인테리어가 유행하기 전에 선도적으로 그런 분위기의 매장을 했던 모 카페에서는 학생 할인을 받아 엄청 싸게 시킨 아메리카노 한 잔 씩을 놓고 친구들하고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 노가리를 까고는 했다. 정말 좋은 카페였는데 아마 우리 같은 학생들만 많았던 탓으로 그 카페는 2년여 뒤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외에도 학교 내 입점한 소규모 체인점 커피집에서 생협 직원분이 내려주는 카푸치노가 가격 대비 맛이 아주 훌륭해서 자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커피에 길들여져 하루에 못해도 한 잔은 했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처럼. 내가 알았던 어떤 아저씨는 그게 밥 먹고 숭늉 먹는 한국의 문화가 커피로 바뀐 것이라고 했는데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재미있는 지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밥 먹고 숭늉 안 먹었는데? 할머니집에서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3. 로스쿨 커피 동아리

로스쿨 입학하고 맞은 1학년 첫여름방학. 예전에 제주도를 함께 갔던 학부 친구들이 다시 뭉쳐서 제주도로 또 향했는데, 바닷가 근처의 독채 펜션을 숙소로 했다. 정갈한 그 펜션에는 그라인더를 포함해서 핸드드립 세트와 커피콩이 갖추어져 있었고, 한 번도 커피를 갈아내려 본 적이 없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호기심에 커피를 내려보았는데, 아무렇게나 내렸는데도 커피가 맛있는 것이 아닌가! 향도 살아있고, 물도 적당히 맞고, 좋았다.  유레카. 내가 왜 비싼 돈을 주고 입맛에도 안 맞는 체인점 커피를 사 마셨는가. 콩만 있으면 내려 마시면 그만인 것을. 아마도 학교 생활이 단조롭고 지겨워서인지 몰라도 나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커피 드립퍼 세트를 주문했다. 문제는 학교 비치인데... 학교엔 보관할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특히 나 혼자 쓰기에는. 그래서 도서관 관리하는 친구들에게 허락을 구해, 열람실 입구에 빈 탁자에 도구를 세팅해 놓고 동기들이 알아서 자유롭게 쓰도록 비치해놓았다. 물론 주로 내가 해서 먹었지만, 나중에는 알아서들 잘해서 먹었다. 그러던 차에 동아리 등록이 되면 지원금도 나온다길래 애들을 모아서 동아리 창설 신청을 했고, 이제는 아예 동아리로 자리 잡았다. 물론 나는 손을 뗐고 이제는 후배들이 알아서 하는데 요새는 활동은 없는 거 같긴 한데 물적 설비는 아무튼 유지되고 있고, 개별적으로 내려 마시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다. 


4. 근황

정작 나는 이제 마음 급하고 바빠서, 삼박자 커피나, 요새 유행하는 커피스틱 사놓고 그냥 물 타서 마시는데, 왜냐면 맛보다는 마셔서 잠 깬 상태에 있는 것이 중요해서이다. 한참 많이 마실 때는 하루에 세잔도 마셨는데 이제는 한 잔에서 두 잔 정도로 줄였다. 중간에 줄여지지가 않아서 아예 한 학기 정도 끊었다가 요새는 도로 마신다. 


아마 앞으로도 커피는 평생 입에 달고 살지 싶다. 기후변화하면 커피 생산량이 줄어든다고 하던데 제발 비싸지지 말아라 ㅠ 그래야 나 같은 것들도 커피를 입에 달고 살 수 있지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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