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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통하고 있는가?

말은 자신을 드러낸다.

by 심상

어느 날의 오후, 혼자서 카페를 갔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사람들의 대화는 낮게 흘렀고, 창밖에는 초여름에 눈부신 햇살이 따뜻하게 깔려 있었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 밝은 햇살과 달리 마음은 담배연기를 머금은 것처럼 답답했다. 어제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그 말, 하지 말 걸 그랬어…”

내 발언이 누군가에겐 불쾌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지?"라고 물어도 아무도 티를 내지 않았고 모두 “괜찮아”라고만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알고 있다. 그 말, 굳이 하지 말았어도 됐었다고. 너무 말을 많이 했다고 말이다.




말은 사람의 전부를 보여준다.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속에 다 녹아 있다. 단어 하나, 어조 하나, 문장 끝의 호흡까지도. 그건 단순한 말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왜곡된 3차원 세상에서 내가 정리하고 받아들이기로 허락한 세상의 방향인 셈이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알려주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또는 내 안에 눌린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서 말을 했다. 내 입은 보물을 보관하는 자물쇠가 아니라, 잠금 해제되서 혼자서 읖조리는 소음 같았다.


“이건 이렇게 하면 되더라구요.”
“그건 제가 좀 아는데요.”

"제가 배워보니까요..."


말끝마다 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만남이 끝난 뒤 느껴지는 감정은 해소감이 아니라 허탈감과 허무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한 대화가 재미있었어? 정말 소통한게 맞아? 왜 만족하지 못하지 못하는 거지?”라고 말이다.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그 의문이 흐릿해질 시점 유튜브에서 홍진경을 보았다.

엉뚱하고 허술한 질문, 그러나 누구보다 정확하게 본질을 찌르는 태도. 그녀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묻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나는 모른다'는 태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제야 자신의 세계가 분명한 사람만이 그렇게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이 많다는 건 정보를 흘리는 일이다. 말은 항상 정보를 담고 있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를 낱낱이 노출하게 된다.

"그건 제가 예전에 해봤는데요..."
"아,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아요."


이 말들 저편에는 꼭 '나를 좀 알아주세요'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 백종원이 어떤 한 상황에서 '확 인수해 버릴까?'라고 발언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돌아다닌다. 그 한마디 속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런 말을 깊이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그 말에서 느껴진 태도를 감지한다.


‘좀 아는 척하네.’
‘내가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과시하나? '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그 순간 말에 담긴 뉘앙스는 고스란히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 미세한 표정과 말투의 떨림은 언젠가 되돌아와 내 가슴을 콕 찌른다.


‘그땐 굳이 안 해도 됐던 말이었는데…’하고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만난 지 별로 되지 않았거나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있다. 살다 보면 이상하게 끌리는 사람들이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속이 풀리는 사람.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사람. 왜 이런 사람에겐 쉽게 마음을 터놓게 될까?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있었다.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가진 사람. 그 세계는 말이 많지 않지만 깊고, 호기심으로 가득하되, 침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에 앞서 나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기분은 어땠어요?”


이런 질문은 나의 기분을 나쁘게 파고들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를 더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질문들은, 마치 오래된 방 안에 잠들어 있던 나의 기억과 감정을 조심스레 흔든다. 날카롭지만 관조한 듯한 질문은 따뜻한 햇볕 속 산들바람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옷을 벗고 바람을 느껴도 괜찮겠구나'마음에 조심스레 열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이런 게 대화구나. 이게 말의 깊이구나.”

진짜 고수는 대답보다 질문에 강하다

인생엔 정답이 없다. 누가 대신 풀어줄 수도 없다.
진짜 고수는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그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나요?”

"상대를 이해 못 하기에 앞서, 상대의 나이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이런 질문 앞에 서면, 처음엔 당황스럽다.
‘아니, 그냥 알려주면 되잖아…’
하지만 스스로 답을 찾아본 경험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강한 힘이 된다.

번지점프대 위에서 누가 등을 밀어 떨어뜨렸다면,
다시는 그곳에 서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뛰어내렸다면, 그 아찔한 공포 선택하고 끝에선 해냈다는 용기가 자라난다.

고수는 바로 그걸 아는 사람이다. 말을 통한 답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사고를 한층 넓혀주는 방식을 아는 사람. 내 안에 답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

이제 나는, 말 대신 질문을 품는다. 이제 나는 말을 줄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금 이 말, 꼭 필요한가?"
"이 말은 상대의 세계를 존중하고 있는가?"
"내가 이 사람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구체화했는가?"


그러자 드러내고, 인정받고, 알려주고, 해소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도 후회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침묵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진짜 어린아이처럼 어리숙한 눈으로 질문을 하고, 말을 할 때는 말의 무게를 알고 성인군자처럼 더 신중하게 침묵하고, 더 솔직하게 말하려는 노력 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마음과 태도로 삶을 살아내다 보니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말하면서 해소하는 게 아니라 듣고자 하니 해소되는 아이러니한 경험. 상대의 사고가 확장되고, 이해의 범위가 넓어지는 모습을 볼 때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나와 대화를 통해서 상대가 진심으로 변화하는 걸 원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일방적인 말이 아닌 주도적인 듣기에서 시작된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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