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내가 쥐고 있는 패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을까?”
화려하지도, 반짝이지도 않는 이 패를. 불편한 감정과 진실이 묻어 있는 이 면을.
나는 얼마나 집요하게, 얼마나 진솔하게 마주해왔을까.
사람은 자신이 가진 패의 진짜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 남이 들고 있는 패가 더 커 보이고, 더 빛나 보이는 이유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분명 그 비교는 살갗을 베어내는 바람처럼 날카롭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이 그저 속담처럼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재물, 명성, 권력을 ‘산’처럼 쌓고 오르기 시작했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계단을 만들고, 지키기위해 성을 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등산이 아니라 건축에 가깝다. 쌓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렵고 지치는 건 오르면서도 계속 보수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정상에 닿았다 해도, 결국은 깊은 골짜기를 만난다. 그것이 삶의 순리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쌓고 오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남과 비교하며, 얼마나 높이 왔는지 계단을 세어본다.
이 비교의 굴레는 생각이라는 사념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역설적으로 그 ‘생각’이 우리를 가장 크게 속박한다. 어린아이는 생각이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빛과 소리, 감촉을 즐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며 우리는 획을 긋고, 경계를 만들고, 차이를 인식하며 ‘생각하는 법’,'구분하는 법','비교하는 법'을 배우고, 그 생각 속에 갇힌다.
나는 지금 말하고 싶다.
“비교로부터,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내려놓음은 어쩔 수 없는 포기가 아니라 주도적인 해방이다. 내려놓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고 싶은 욕망, 더 많이 쌓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은, 마치 손해를 참지 못하는 초보 주식 투자자처럼 보인다. 주식 트레이딩의 고수는 수익을 많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손절매’를 잘하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 말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끝까지 옳기를 바라고 또 믿고 싶어 한다. 실패를 인정하기보다는 조금 더 버텨보겠다고 매달린다. 하지만 한두 번의 실패를 거치고 나면, 우리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확신은 오만이었고, 자신감은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말이다. 이 후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유하는 뗏목처럼 흐름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잘 산다는 건, 불필요한 것을 도려내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불편한 조건, 불리한 상황조차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편한것과 불리한 것이 꼭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은 항상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있다. 그 둘을 억지로 나누고 해석하며, 나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렌즈를 낀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성장, 도전, 성취라는 키워드만이 아니라, 후회, 손실, 조급함까지도 껴안아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 내 곁에 머무는 사람들과의 복잡한 관계조차도,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생각의 지평은 깊고 넓어진다.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내가 불안해하고, 불편해했던 감정들을 조용히 마주해보자. 그 어둠 속에는 아주 작지만 진주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너무 희미해서 보이지 않았던 태초의 빛, 그 빛이 어둠을 뚫고 나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쪽으로 손을 뻗게 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이 말은 먼 옛날의 지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안의 낡고 잊힌 것들, 내 곁의 익숙해서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조건, 상황, 관계, 과거를 새롭게 인식하고 재설계 해봄으로써 그 동안 자신을 가로막았던 것들이 결국은 필요했음을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저편 넘어를 볼 때 안개처럼 가려진 희미한 연기 속에서 직선으로 광할하게 뻗어진 고속도로가 보일 것이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행복’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