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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찔레꽃 May 01. 2023

길에서 길을 묻다

20일 도보 국토 종단기(제7화)

4월 5일 수요일


힘들게 눈을 떴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걸 보니, 밤새 비가 내린 듯하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다. 어제 앱으로 순창읍까지의 거리를  살펴봤는데 20km밖에 안 되고 시간은 5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중간에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산책길에서 시간을 보낸다 해도 제아무리 길어봐야 2시간을 넘기지 않을 테니, 총 7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다. 평소보다 좀 늦게 출발해도 될 것 같다. 다시 눈을 감고, 복식 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들숨과 날숨을 같은 간격으로 들이쉬고 내뱉다가 어느 순간 들숨이 최대한으로 마셔지며 배가 산만해졌다 꺼지면 몸이 개운하다. 컨디션이 좋으면 배가 산만해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 걸리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오늘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계를 보니, 6시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다. 불린 누룽지와 소시지 모닝빵 그리고 사과 한 알로 아침 식사를 했다. 샤워하고 옷을 입은 뒤 짐 정리와 주변 정리를 마치고 억지로(!) 『고문진보』 한 소금까지 읽어 출발 전 의식행사를 모두 마쳤다. 시간이 꽤 남는다. 가만, 오늘은 점심을 점심답게 한 번 먹어보자!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노정에 나와 있는 음식점을 찾는데, ‘해밀 찰보리 국수’라는데가 나온다. 오우, 맛있겠는데! 숙소에서 이곳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살피니 7.9km에 2시간 3분이라고 나온다. 8시쯤 출발하면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산책길을 거쳐 점심 타임 시작인 11시에 충분히 도착할 것 같다. 그래, 오늘은 꼭 ‘해밀 찰보리 국수’로 점심다운 점심을 먹어 보자!


그런데 멍하니 8시까지 기다리기가 답답하다.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결국, 5분을 남겨두고 모텔을 나섰다. 아무래도 나는 곰의 자손이 아니고, 호랑이의 자손인가 보다. 비는 살짝 내리지만, 환한 아침을 대하니, 기분이 상쾌하다. 간밤의 뒤숭숭했던 기분이 싹 가신다(염불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조금 걸었는데,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산책길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리가 얼마 안 된다.


‘담양 유럽 마을 Engelberg 신축공사’란 입간판이 보인다. 관광단지를 만드는 걸까, 유럽풍의 정착촌을 만드는 걸까?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 선비의 고장인데 유럽풍의 건축물을 짓는다니 뭔가 어색하다. 지자체가 돈에 환장했구나.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전통 시설물이라고 하는 것도 대부분 새로 지은 것이라, 엄밀하게 말하면, 전통 시설물이라고 할 수가 없다. 껍데기만 전통 시설물일 뿐이다. 우리 전통 시설물은 한국전쟁 통에 대부분 파괴됐다. 유럽은 세계대전을 치렀어도 시설물들이 돌로 된 것들이라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비록 형체뿐일지라도), 우리 시설물은 나무로 된 것들이라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 지어지는 시설물은 전통 시설물이 아니라, 신축 시설물이다. 그렇다면, 저 ‘담양 유럽 마을’ 공사와 다를 바가 뭐 있으랴. 껍데기만 우리식으로 한 것뿐이지. 이렇게 보면 굳이 저 ‘담양 유럽 마을’을 백안시할 게 뭐 있으랴. 저것은 껍데기만 외국 거지, 실(實)은 우리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그렇지만 저런 건축물의 원조는 유럽 것인데, 그걸 어떻게 우리 거라고... 이 사람아, 원조가 뭐 그리 중요한가. 그것을 꽃피우는 게 더 중요하지. 내가 생각하기엔 제아무리 유럽식으로 짓는다 해도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의식을 반영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시설물은 우리 것이여. 우리 사상에 우리만의 것이 어디 있냐고 볼멘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다 어리석은 소리여. 유교, 불교, 기독교… 다 원조는 외래 것이지. 허지만 그건 발신일 뿐이고, 그것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유교, 불교, 기독교는 다 우리 것이여. 난, 다 그것들 저류에 우리 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생각혀. 굳이 무속신앙 동학 등을 운운하며 우리 고유 사상을 내세울 필요 없다고 생각혀. 어떤 것이 들어와도, 이 땅에 들어오면 다 우리 것이여. 다시 말하지만, 발신을 너무 강조할 필요 없어. 주눅 들 필요도 없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꽃 피우느냐여. 이 땅의 유교, 불교, 기독교 등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조선이 됐다고 한탄하셨지만, 나는 조선의 유교, 불교, 기독교가 됐다고 생각혀. 그러면 그것이 왜 조선의 유교, 불교, 기독교냐고? 세상에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큰 마찰 없이 조화돼 유지되는 국가가 어디 있어? 읎어! 이것이 우리 의식의 특징이여. 비빔밥 의식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그럴듯한 말로 원융(圓融) 의식이라고나 할까? 어떤 것이 들어와도 좋아, 우리는 능히 그것들을 다 소화해 낼 의식이 있는 민족이여. 듣자 허니, K팝의 특징이 바로 이런 다양성의 조화라고 하던디, 딱 맞는 거여! 간판 신축공사 입간판을 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만~~! 

처음엔 담양에 어울리지 않는 공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신축된 전통 건축이나 저 건축이나 뭐가 다르냐 싶었다.


죽녹원에 들어선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다! 매표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냥 들어섰다. 오늘은 평일인 데다 밤사이 비까지 내려 손님이 많지 않을 듯하다. 죽녹원은 일종의 대나무 테마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사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 이곳에(메타세콰이어 산책길도 그렇고) 들를 생각도 없었다. 어제 가족 단톡방에 오늘 일정을 알렸더니, 처가 이 두 곳에 가보고 싶은 듯한 문구를 남겼기에 선물로 사진을 찍어 보내려고 들른 것뿐이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대나무 산책길과 조경들을 감상하자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뭔가 독차지했다는 뿌듯함도 든다. 아내가 좋아할 만한 풍경을 몇 컷 찍고, 잠시 한옥 건물 추녀마루에 앉아 셀카도 한 장 찍었다. 화창한 날에 찍는 것도 멋있겠지만 실비 내리는 우중에 찍는 것도 운치가 있다. 더구나 한옥에서 찍으니 더. 죽녹원을 나서려 매표소를 지나치는데 문이 열려있다. 그냥 가기가 무서워(?) 사실을 말했더니, 그냥 가란다! 고맙습니다~~. 다시 메타세콰이어 산책길로 출발~.

대나무 산책길. 홀로 누리는 평화와 소유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장쾌한 메타세콰이어가 눈에 들어온다. 한여름에 봤으면 더 멋있었을 것 같다. 봄철, 그것도 우중의 메타세콰이어는 낙심하여 어깨 쳐진 거인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산책길로 들어서려는데, 아이고, 여기도 입장료를 내야 한단다. 으, 이놈의 입장료. 2천 원인데, 왠지 비싼 느낌이다. 매표소 아가씨한테 농으로 "그냥 보내주시면 안 돼요?" 할까 싶어 얼굴을 쳐다봤는데, 잘못하면 뺨 때릴 듯한 인상이다. 아무 소리 않고 입장료를 냈다. 오래전 기억. 집에서 출퇴근하며 군 생활할 때(나는 군부대 방위 출신이다. 아내가 방위 출신이라고 어쩌다 놀리는데, 뭐 현역만큼은 아니래도 나도 고생할 만큼은 고생했다. 군부대 방위는 면 단위 방위와 달라, 근무 기간이 짧고 출퇴근만 한다 뿐이지, 현역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 여보, 앞으로, 놀리지 말아 주세용~) 한 번은 차비가 부족해 매표소 아가씨한테 차비 좀 깎아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는 매표소 아가씨 얼굴도 안 쳐다보고 그랬는데, 무슨 용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무시하는 방위에다 사정이 다급하니 나도 모르게 그런 용기를 낸 것은 아닌지? 그런데, 이 아가씨, 표값을 깎아줬다! 다음 날, 표를 살 때 고마웠다며 작은 선물을 줬다(소설 같으면 그다음 무슨 사연이 이어졌겠지만, 그 이상은 없다). 하여,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이런 경험 한 사람 거의 없을 것 같다. 무임승차면 무임승차지 표값을 깎아서 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표값을 깎고 차를 탄 적이 있다. 모든 게 자동화되는 세상엔 이런 맛(?)이 없다. 허허, 역시 나는 아날로그 세대인개 벼.


표를 받는 아주머니(내 나잇대보다 조금 아래로 보였다)에게 표를 내미니, 살짝 놀라는 눈치다. 평일 이른 시간에 그것도 비가 오는데 혼자서…. 눈치를 보고, “도보 여행 중입니다.” 했더니, “좋은 때 오셨네요. 고독을 씹으며 걷는 게 제맛이죠.” 하신다. 그런가? 조금 걷다가 왠지 사진 한 장을 찍고 싶어 뒤돌아서는데, 묘하게 검표하는 아주머니가 내 쪽으로 온다. 사진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그러잖아도 찍어드리려 했는데….” 하신다. 이런 걸 이심전심이라고 하나? 여러 포즈를 잡아 보라며 성의껏 찍어주시는데, 포즈 잡는 데는 영 젬병이라…. 조심해서 가라고 당부하신다. 감사합니다~. 중간중간에 아기자기한 빵집 찻집이 있는데 잘 어울려 보인다. 천천히 걸으면 꽤 긴 느낌이 들만한 산책길인데,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겐 그렇게 긴 길이 아니다. 더구나 간밤에 내린 비로 도로가 축축해 걷기도 불편하다. 아름다운 낭만일랑 접어두고, 오로지 점심다운 점심을 위하야 ‘해밀 찰보리 국수’ 집으로 다시 출발!

이 산책길은 이 순간만큼은 전부 내 것이닷! 하늘이여, 축복해(?)  주소서!


이게 국도냐, 지방도냐, 걷는 길이 너무 불편하다. 인도(人道)가 없다시피 하고, 풀이 무성한데,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하기까지 하여 걷기가 몹시 불편하고 힘들다. 차라도 안 다니면 차도를 사용해 걷겠는데, 그도 어렵고. 이따금 배려심 없이 지나가는 차 때문에 빗물도 튕긴다(나는 앞으로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얼마쯤 걷다 보니 금성면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농협 건물도 보인다. 현금을 좀 인출할 생각으로 들어가 현금을 찾아 나오는데, 길 건너편에 ‘비단 밥상’이란 한식뷔페 식당이 보인다. 음, 저기서…. 시계를 보니 11시에 육박한다. 아녀, 애초 목표했던 식당에서 먹어야지. 다시 도로로 나와 걸으려다 생각을 바꿨다. 우중인 데다 인도 상황이 너무 불편해 잘못하다 황천길 갈 염려도 있다. 저기서 점심을 먹고, 오늘은 버스를 타고 순창으로 이동하자.

오발에 꿩 잡은 한식당 뷔페. 주인도 식단도 모두 '비단'같다.


식당에 들어서니, 갓 세팅을 끝낸 것 같다. 내가 첫 손님인 듯싶다. 눈앞에 보이는 다양한 반찬들. 우와, 이게 얼마 만이냐!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분한테 “선불이죠?” 했더니, 그렇단다. 대금(1만 원)을 지불하고, 혹시 여기서 순창 가는 버스가 있냐고 물었더니, 있을 거라며 물어보고(아버지께) 알려 주겠단다. 후덕한 인상답게 친절하다. 이것저것 맘에 드는 것을 담는데, 식단에 비해 가격이 너무 저렴한 것 같다. 이곳 매력은 본인이 프라이를 해 먹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주인으로 보이는 노부인께 “남는 것 있으시냐?”고 했더니, 웃으며 그냥 인건비 정도만 건진다고 하신다. 예전에도 식당으로 운영했던 듯 밥 먹는 장소는 방으로 돼 있고 전부 입식으로 바꿔놓았다. 혹 신발을 벗고 들어갈까 봐 염려했는지, 그냥 신발 신고 들어가면 된다고 안내문이 쓰여 있다. 친절하구나. 생각 같아선 배불리 먹고 싶었지만, 경험상 배부르면 되레 걷기 힘들어(오늘은 더 이상 안 걸을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써 식욕을 절제하며 먹었다. 젊은 사장이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표 파는 데가 있고, 순창 가는 직통도 있어요.”라고 알려준다. ‘비단 밥상’은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인 듯싶다. 처음에는 부모가 운영하다, 아들 내외(젊은 사장의 처인 듯한 젊은 여인네가 있었다)가 운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특하다. 부디 번창하시길! 잘 먹은 데다 작은 친절이 고마워,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한다. 내 글을 볼 사람이 많지 않아 이곳을 알린다고 하여 올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작은 홍보로나마 친절에 보답코자 사진을 찍었다(지금 글을 쓰며, 앱으로 식당 이름을 검색해 보니, 주소가 '담양군 금성면 석현길 6'으로 나온다. 이 글을 읽는 벗들이여,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어 산책길을 들렸다면 점심은 이곳에서 한 끼 드시라. 입 짧고 쫀쫀한 소생이 추천하는 곳이니, 후회하지 않을 터.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더구나 차를 타고 왔다면 더더욱!).

오, 이게 얼마만이냐? 맨날 불린 누룽지와 빵 사과 오이만 먹다 상차림을 보니 눈알이 뱅글뱅글 돈다.


차표 파는 곳에 가서 표를 사며 주인에게 차가 몇 시에 오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른단다. 오잉? 그러고 보니 차표에 승차 시간이 없다. 매표소에 승차 시간도 부착 돼 있지 않다. 그런데 옆에 있던 한 청년이(마실 온 듯한) 좀 전에 담양 쪽으로 차가 들어갔는데, 한 12시 40분쯤이면 탈 수 있을 거라고 한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아이고, 차만 탈 수 있다면야). 그러면서 길 건너편 헙수룩한 집 추녀 밑에서 기다리란다(따로 승강장이 없다. 담양 가는 쪽에는 승강장이 있는데). 거기서 기다려야 차를 타지, 안 그러면 차가 그냥 지나친단다. 또 작은 친절. 감사합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 길 가 헙수룩한 집 추녀 밑 돌 의자(?)에 앉아 있자니, 쓸쓸하고 무료하다. 셀카를 찍어봤다. 아이고, 입술이 부르텄네, 눈도 힘들어 게슴츠레하고. 그간 거울을 자세히 안 봤는데, 내가 봐도 몰골이 좀 불쌍해 보인다. 이거, 처한테 사진을 보내면 그 감수성 많은 사람이 걱정할 것 같다(가족 단톡방 사진에서 뺐어야 하는데 , 정신 놓고 그냥 올려, 처한테 걱정을 들었다. 여보,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씽씽합니닷~).

게스치레한 눈빛과 부르튼 입술. 은근 피곤했던가 보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드디어 차가 왔다. 그냥 갈까 봐,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따뜻한 버스 안의 온기. 너무 기쁘다, 아니 황홀하다. 민폐를 끼칠까 봐 뒷자리로 가 공손히 앉았다. 차창으로 보이는 우중 풍경을 여유 있게 바라본다. 걸어갔으면 쳐다볼 엄두도 못 냈을 풍경.  시선을 돌려 차 안을 보는데 차 시트에 ‘애 키우기 좋은’ 운운의 홍보 문구가 붙어있다. 지방의 인구 감소 문제를 또 실감한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 오해받을 것 같아 그만뒀다.


순창 버스터미널에 도착, 숙소로 점찍은 곳을 찾으러 갔다. 오늘은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어야겠다. 도중에 하나로 마트가 있어 간식거리를 사고(좋아하는 금귤도 샀다), 숙소를 향해 전진하는데, 이거 날씨가 보통이 아니다. 비가 오는 데다 바람까지 드세다. 우산이 뒤집히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숙소가 안 보이냐, 혹시 잘못 가고 있는 거 아녀? 천변 중간에 있는 정자에 올라 다시 숙소를 확인하고 출발했다. 저 멀리 점찍은 숙소가 보인다. '멘하탄 모텔'. 아이고 고마워라. 이곳을 숙소로 점찍은 건 2시부터 입실이 가능해서였다. 그런데 숙소 이름이 너무 어색하다. 뭐여, 순창은 뉴욕이고, 중앙의 물길은 허드슨 강이란 말이여? 아이고, 차라리 ‘고추장 모텔’이라고 이름 붙이면 낫지 않았을까? 촌스럽지만 사람들 뇌리엔 콱 박힐 텐데.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드디어 숙소 입구에 도착. 그런데, 좀 을씨년스럽다. 청소 상태도 불량하고. 객실 밖으로 나온 에어컨을 보니 많이 낡았다. 내부 시설도 형편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 이른 시간이라 그럴까, 출입문 안에 들어서니 ‘객실 점검 중’이란 안내문과 함께 필요하면 벨을 누르라고 돼 있다. 벨을 누르니, 주인아주머니가 나오는데, 아, 인간들의 저급한 욕구를 상대하면서 오랜 세월 살아온 인정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눈빛의 아주머니가 나온다. 갑자기 ‘벌꿀 호텔’의 그 선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숙박료를 물으니, 4만 원이란다. 혹 현금 내면 깎아 주시냐고 물으니, 묵묵부답. 더 말해봐야 효과 별무일 것 같다. 어덕이 있어야 비비지. 역시 인상 값 하신다. 비용을 지불하는데, 뜻밖의 소리를 한다. “미안해요~.” 그러면서 아직 보일러 가동 시간이 아니니 추우면 침대 전기장판을 틀란다. 오잉? 방안에 들어서니, 강진읍 ‘모란 모텔’과 비슷하다. 아이고, 이 사람아 우중에 이렇게 일찍 숙소에 들어온 것만도 감사해야지! 비에 젖은 옷을 옷걸이에 걸고 배낭 속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꺼내 바닥에 널어놓았다. 샤워하러 들어갔다. 혹시 온수가 안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온수는 나온다. 속옷을 갈아입고 속옷과 양말 그리고 스포츠 티셔츠까지 빨래하여 널은 뒤 침대에 들어갔다. 요가 기모로 돼 있어 따뜻해 굳이 전기장판을 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왠지 청결감엔 의심이 간다. 커튼을 열어보니 길가를 달리는 차들이 보인다. 소음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TV를 켜고, 또 음심(淫心)이 발동하여 야한 영상을 볼까 해 리모컨으로 여기저기 채널을 누르는데, 안 나온다. 잘됐다! 하하. 시답잖은 프로 이것저것을 보다, 누룽지와 빵 오이와 금귤로 식사를 하고 간단한 메모를 한 뒤 가족 단톡방에 일찌감치 소식을 전했다. 오늘 저녁엔 다시 곰의 후손으로 되돌아가야겠다. 5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한무 형한테 전화가 왔다. 이 인정 많은 형(그러나 선(線)도 확실한) 형, 한 번은 전화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허허~. 일본엔 잘 다녀오셨냐니, 좋았단다. 귀가하면 경험담 좀 들어야겠다. 저녁 6시가 못 되어 커튼을 굳게 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는 특기도 있지만 잠 많이 자는 특기도 있다. 


내일은 임실까지(그 말썽 많은 임실. 하하. 내일 치를 기대하시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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