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독서

by 찔레꽃


청춘의 독서.jpg
실력 기초.jpg
산방한담.jpg
유시민 씨의 『청춘의 독서』(좌), 안현필 씨의 『영어실력기초』(중), 법정 스님의 『산방한담』(우)



기숙사에 있는 아들아이에게 택배로 여름 옷가지를 보내면서 책 한 권도 동봉했다. 『청춘의 독서』. 요즘 핫한 유시민 씨의 책이다. 사실은 내가 읽어 보려고 산 책인데, 대학에 다니는 아들아이가 읽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아들아이에게 보내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보냈다.


보내기 전 목차만 훑어보았는데, 사회과학 관련 책들이 많았다.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유한계급론』, 『자유론』, 『사기』 등. 이름은 들어봤지만 거의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다 만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의 몸을 형성하듯 읽는 책이 그 사람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대국민 신경 안정제 유시민 씨는 저런 책들을 읽었구나~.


그와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넓게 보면 비슷하다 할 수 있는 시기를 살았던 나는 어떤 청춘의 독서를 했던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본다. 『상록수』,『러브스토리』,『순애보』,『유정』,『산방한담』,『自由人, 자유인』,『한비자』.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아야 한다”는 말처럼 뭔가 의식에 큰 영향을 주거나 놀라움을 안겨줄 때 읽는 이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인데, 이 책들이 내게 그런 정도의 책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그저 읽은 책이 별로 없고 그중 감정적으로 몰입을 준 책이기에 떠오른 것이 아닐까 싶다.


『상록수』『러브스토리』『순애보』『유정』은 사랑에 관한 내용이 주조인데(『상록수』는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한창 사춘기였던 고등학교 때 읽었던 터라 기억에 남는다(지금 읽는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때에 맞는 독서란 그래서 의미가 있는 성싶다). 법정 스님의『산방한담』은 재수 시절 읽었던 책으로, 당시 내게 불교는 왠지 칙칙하고 약간 겁이 나기도 하는 그런 종교였는데(불당의 단청과 향 냄새가 큰 원인일 터이다), 스님의 글 덕분에 그런 인식이 불식됐다. 스님의 글이 이렇게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한 구절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이영희 교수의『自由人, 자유인』은 교직 발령 초기에 읽었던 최초의 사회과학 계통 서적인데, 남북한 군사력 비교 논문과 주한 미 대사 릴리에게 보낸 공개 서한이 인상 깊었다. "내가 비록 영어에 능통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는 당신(릴리)과의 대화는 한국말로 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내 의식을 최초로 ‘계몽’ 시켜준 책이 아닌가 한다.『한비자』는 신혼 초기에 읽었던 책인데(이때까지도 청춘이란 말이 해당된다면), 인간의 이기적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포착한 책이 있었나 놀랐었다. 학생들의 매우 이기적인 모습에 실망하던 차에 우연히 읽게 됐는데, 학생들의 이기적 심성을(나아가 인간의 이기적 심성을) 2천 년도 훨씬 전에 그림 그리듯이 묘파하고 있는 것에 감탄했었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유시민 씨 같이 훌륭한 분 말고, 그저 그런 장삼이사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청춘의 독서는 교과서와 참고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의 진짜 청춘의 독서는 위에 나열한 저 책들이 아니고,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한다.『영어실력기초』. 안현필이란 분이 지은 영어 참고서인데,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미 퇴물이었던 책으로(내 전(前) 세대에게 유행했던 책이다) 내 친구들도 잘 모르는데 어떤 경로인지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기초부터 아주 세심하게 안내하는 내용과 저자의 ‘잔소리’(책에 ‘잔소리’라는 코너가 있어 공부하는 자세, 방법, 삶에 대한 자세 등을 훈계한다)에 힘입어 ‘수포’는 했어도 ‘영포’는 하지 않아, 이후 영어 덕을 꽤 보았다. 수학에도 이런 류의 책이 있었으면 ‘수포’ 자도 안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이렇게 보니, 나는 유시민 씨와 달리 내 개인의 삶에만 매달린 책을 읽은 것 같다. 애고, 좀(아니, 많이) 부끄럽네.


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독서는 사실 별로다. 내가 책을 좋아하면서도 안 읽는 사람이란 것은 교직 초기 책 외판원에게 샀던 삼성출판사판『대 세계의 역사』를 지금에사 읽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책을 사놓은 지 삼십 년이 넘어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퇴직하고 나서 많은 시간 아니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소일하고 있다. 갑자기 독서를 좋아하게 돼서가 아니다. 사놓은 책이 아깝고, 돈 안 들이며 고상한 척 하기에 최적물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러니, 독서가 즐겁기보다는 좀 괴롭다.


그런데 억지로 하는 독서가 괴롭기는 하지만 이따금 교훈도 주기에 괴로움을 견딜만하다. 독서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저 괴롭게만 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음, 그건 그렇고, 최근에 『대 세계의 역사』를 읽으면서 깨달음이랄까 하는 것을 얻었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삶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원시 시대부터 시작해 발전해 온 인류의 역사를 읽어가노라니(현재 12권 중 6권, 「르네상스 시대와 아시아의 왕조」까지 읽었다), 왠지 삶에 대해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사라져 가는 게 당연한 것인데 마치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했기에 삶에 대해 불안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삶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삶을 너무 고귀하게 여길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롭게 읽고, 읽은 내용도 머릿속에 남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만한 소득을 어디서 얻겠는가.


유시민 씨도 노년을 향해 간다(아니, 노년이다). 언젠가 그는『노년의 독서』를 내지 않을까? 『청춘의 독서』를 냈으니 기대해 볼 만도 하다. 특히나 요즘 평균 수명이 길어져 청춘의 삶도 소중하지만 노년의 삶도 그 못지않게 소중하게 됐으니 더더욱 그런 기대를 갖게 된다. 출판사들이 기대하지 않을는지? 문득, 내 노년의 독서는 어떤 목록을 갖게 될는지 생각해 본다. 적어도 청춘의 독서보다는 풍부할 것이다(앞서 말한 대로 시간이 여유롭고 쪼잔한 품성에 취미 삼을 것이 독서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어쩌면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늘 끝까지 가보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