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첫 소절. 갑자기 민주 투사가 되려고 불러 본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처지를 대변한 것 같아 불러 본 것. 단 여기 ‘너’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검은색’이다. 내 머리는 검은색을 잊어버린 지 너무도 오래됐다.
옛 시를 읽다 보면 늘어나는 백발을 탄식하는 시들이 많다. 오늘 읽은 시도 그랬다.
一官何幸得同時 / 十載無媒獨見遺 / 今日莫論腰下組/ 請君看取鬢邊絲
다행히 그대와 함께 벼슬에 올랐으나 / 십 년 동안 보아줄 사람 없어 홀로 버려져 있다/ 오늘은 허리 아래 인끈을 말하지 말고 / 그대여 내 귀밑의 흰머리를 봐주게
흰머리 쇠도록 영달(榮達) 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자신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는 시이다. 예전에는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았으니 흰머리가 는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신출세가 지상 목표였던 시절 흰머리가 느는데 영달하지 못했으면 삶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니, 한탄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런데 이런 한탄은 영달했던 사람이나 호방한 기상을 지녔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宿昔靑雲志/ 蹉陀白髮年 / 誰知明鏡裏 / 形影自相憐
청운의 꿈 품었던 지난날 / 미끄러져 백발 노년에 이르렀네 / 뉘 알았으랴 / 거울 보며 이 몰골 탄식할 줄
장구령의 시인데, 그는 한 때 재상까지 지낸 이이다. 이런 이도 백발을 보며 탄식하고 있다.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 何處得秋霜
흰머리 삼천 길 / 시름으로 이리되었네 / 모르겠구나, 저 몰골 / 어디서 흰머리 얻었는고
호방하기로 소문난 이백인데, 이런 이도 예외 없이 백발을 보며 탄식하고 있다. 이런 할진대, 한낮 티끌 같은 백면서생이 흰머리 느는 것을 탄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부터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저 장구령이나 이백은 60대 초반에 생을 마감했다(첫 시의 작자 포하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도 이 즈음 아닐까 싶다). 지금 내 나이 바로 저들 나이이다. 게다가 평균 수명으로 보면 앞으로 적어도 10년 많으면 20년은 더 살지도 모른다. 재수 없으면 그 이상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저들에 비해 얼마나 더 많은 여분의 삶을 사는 것인가. 그런데 그깟 흰머리에 탄식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에잇, 나는 흰머리가 아니고 흰색으로 염색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흰머리가 보기 싫다고 염색한다는 사람이 많다. 주변에서도 권한다. 나도 그 말에 따라 염색을 서너 번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안 하기로 했다. 귀찮은 탓도 있지만, 뭔가 위선적인 것 같아서 그렇다. 세월 따라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는 것은(아니, 흰색으로 염색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뭐가 보기 싫다는 건가. 염색을 하거나 권고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젊게 살고 싶은 불가능한 욕망을 은연중 투사(投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투사를 굳이 수용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이후 내게 염색을 권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민해경의 노래 한 소절을 개사해 대답으로 대신하련다.
내 머리는 나의 것 /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 내 머리는 나의 것 /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