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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명당자리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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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을 앞두고 이런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 뼈를 묻겠다.” 살벌한 결심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뒤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자본론》을 썼다는 마르크스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아서였다. 마르크스도 이랬는데 하물며 나 같이 미미한 존재가 도서관에 뼈를 묻는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자본론》에는 발 끝의 때 만도 못 미치겠지만 꾸준히 도서관을 오가다 보면 나도 뭔가 의미 있는 책 한 권쯤은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퇴직한 지 3년 가까이 된 지금, 그때의 결심이 자꾸 희미해진다. 처음 2년 동안은 악착같이 매일 도서관에 갔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간다.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도서관의 불편한 자리 탓도 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본다.


내가 다니는 충남도서관은 지은 지 얼마 안 돼 시설이 꽤 좋다. 공간도 넓고 냉난방도 잘되며 책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열람석이다. 이곳의 열람석은 양방향 열람석과 단방향 열람석이 있다. 양방향 열람석은 상대방을 바라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단방향 열람석은 이런 불편함이 없는 대신 채광에 문제가 있다. 햇빛을 등지고 앉는 방향으로 열람석이 놓여 있어 책이나 노트북에 얼비침이 일어나 눈을 몹시 피곤하게 한다. 단방향 열람석 중 이런 문제점이 해결된 곳이 부분적으로 있긴 한데, 아쉬운 점은 이런 열람석은 냉난방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하지만 이런 열람석의 불편함들은 인내심을 가지면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인내심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단점이 충남도서관 열람석에 있다.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전원 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것. 누군가는 다수가 노트북을 사용하는 현실을 감안한 현대적 시설이라고 상찬 하겠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소음이 발생한다는 사실.


소음의 주원인은 키보드이다. 키보드에 스킨을 씌워도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나는데, 많은 이들이 키보드 스킨을 씌우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다. 대신에 키보드라도 살살 눌렀으면 좋겠는데 대부분 마치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장에 나온 듯 키보드를 두드린다. 한 번은 옆자리 젊은 친구가 하도 요란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길래 살짝 엿봤더니, 진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연습을 하고 있었다. 키보드 소음은 생각 외로 심각하다. 계속 키보드를 두드린다면 그나마 백색소음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멈췄다 이어지는 키보드 소리는 여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 옆에서 제대로 독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마르크스가 부활해 충남도서관에 온다면 이 키보드 소리 때문에 분노가 폭발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우스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키보드 소음만이 문제가 아니다.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어 화면의 희번덕거리는 색이 옆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화면에 빛 반사 방지 필름을 끼우면 그나마 좀 덜하련만 역시 대다수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역시 이런 사람 옆에서 제대로 독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키보드로 인한 소음이나 게임 화면으로 옆사람이 독서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 근본 원인은 열람석에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게 전원 설비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 시설을 만든 이들은 매우 현대적인 시설이라고 자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이것이 되려 도서관의 본래 목적인 독서 행위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들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이런 점을 전혀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열람석에다 주의 안내문을 붙여 놓기도 하고 도서관 현관에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자는 홍보 현수막을 내걸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근 3년 여 도서관을 다녔지만 개선은커녕 외려 더 악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러면 근 3년 이런 불편을 알면서 어떻게 버텼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초기에는 어리버리해서 그냥 무조건 참고 견뎠던 것 같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그럴 만한 상황을 피하려 은밀한(?) 자리를 찾아다녔던 것 같고(이도 금방 한계가 드러나긴 했지만).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 점차 도서관 찾는 횟수를 줄였다.


그런데 얼마 전― 지금부터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런 불편을 겪지 않고 오롯이 독서에 몰두할 수 있는 '명당'을 발견했다. 물경 3년여 만에 말이다. 사진 속의 저 자리에 가면 노트북 사용자들이 주는 고통을 피하고 온전히 독서에 몰입할 수 있다. 노트북 사용 전원 시설이 없고 좌석도 한 자리로 만들 수 있어― 원래는 두 자리지만 한 자리를 다른 데로 옮기면 된다 ―옆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 약간의 소음 있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오가면서 내는 소음인데, 이런 정도의 소음은 능히 감내할만하다. 어떤 때는 졸음을 깨우는 청량제 구실까지 하니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이만하면 대단한 명당 아닌가!


사실 이 명당을 진즉에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열람석에 비해 유달리 개방적이라 뜨내기 자리 느낌이 나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노트북 사용자들이 주는 고통을 모면하려는 와중에 시험 삼아 앉아봤는데, 그야말로 '심봤다!'였다. 구체적으로 이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다. 일급정보이기 때문. 하하. 혹시 충남도서관에 가서 온전히 독서에 집중하고 싶다면 꼭 저 자리를 찾으시길 권한다(그러나 소생이 도서관을 찾는 화, 목요일은 가급적 피해 주시기를!). 그런데 저 자리에 앉으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침 9시 도서관 문이 열릴 때 가야 한다는 것. 경쟁률이 치열한 정도는 아니지만, 9시를 넘겨 가면 저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도서관 자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열람석을 그렇지 않은 열람석으로 바꿀 수 없다면 내가 그렇지 않은 열람석을 찾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너무 나약한 태도인가?). 요 며칠 저 명당자리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졌었다. 원하던 자리를 찾았으니 다시 매일 도서관에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다른 이도 이 혜택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문득 이런 우스개 생각을 해본다. ‘마르크스도 나처럼 도서관에서 자신만의 명당자리를 찾아다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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