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原還逐鹿 중원환축록 / 중원에서 아직 제위 다투고 있을 때
投筆事戎軒 투필사융헌 / 붓을 던지고 전차 따라나섰다
縱橫計不就 종횡계불취 / 천하통일의 계책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慷慨志猶存 강개지유존 / 강개한 뜻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 아침 외운 193번째 한시 위징의 '술회(述懷)' 첫대목이다. 이 시는 오언고시로 총 20행의 장편시다. 내용이 길어 어제와 오늘 양일에 걸쳐 외웠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행이 너무 많아 과연 외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어렵지 않게 외웠다. 비결은? 두 가지이다.
우선은 큰 틀로 내용을 구분했다. 위징은 당태종 이세민과 적대 관계였다가 이세민에게 중용된 사람이다. 이 시는 위징이 이세민에게 중용된 뒤 한 때 자신이 그 휘하에 있었던 이건성의 잔당을 일소하기 위해 출정하며 지은 시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총 20행의 시를 4행씩 다섯 단락으로 구분했다. 첫 4행은 위징이 난세에 뛰어들어 자신의 포부를 펴고자 했던 상황을, 둘째 4행은 위징이 당태종에게 중용된 뒤 이건성의 잔당을 일소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을, 셋째 4행은 출정하면서 겪는 험난한 여정을, 넷째 4행은 험난한 여정에서 느끼는 감회를, 다섯째 4행은 자신의 결의를 드러낸 내용으로 보았다. 이렇게 큰 틀을 염두에 두고 시를 외우니 암송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둘째는 인출 훈련이다. 반복해서 되풀이해 읽는 것보다는 앞서 큰 틀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시를 몇 번 읽은 뒤 안 보고 시를 써 본 것이다. 인출 훈련은 상당히 힘들다. 기억이 안 나는 내용을 억지로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 그런데 이 힘든 과정 속에서 기억하고자 하는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당연히 착오도 생긴다. 첫머리에 소개한 시의 3, 4행을 나는 서너 번이나 '縱橫猶不就(종횡유불취) / 悲憤志猶存(비분지유존)'으로 썼다. 인출 훈련이 어렵기는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이 훈련을 해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면도 있다. 어느 부분에서 자주 착각하며 틀리는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틀리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터이다. 아마도 사전에 알고 있는 지식과의 충돌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 아닐까 싶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본의 아니게 작시 연습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큰 틀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된 시어가 기억나지 않을 때는 내 식으로 표현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작시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류 정정 과정에서 나의 시어와 원작자의 시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해 보는 것은 의외로 재미있다.
인출 훈련은 요즘 학습법 책에 많이 소개되어,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사실 나는 이 훈련을 우연히 79년 중학교 2학년 때와 84년 대학교 1학년 때 자득하여 실행한 적이 있다. 물론 결과는 매우 흡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자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것을 공부하는데 제대로 적용시키지 못했다. 아마도 주변에서 그것이 좋은 학습법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말이나 글을 접하지 못하고 학습량이 과중하다 보니 그런 번거로운 훈련보다는 쉽고 간편한 단순 반복을 택했기에, 자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어, 제대로 적용을 시키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진즉에 자득한 이 방법에 확신을 가졌다면 아마도 삶에 많은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시험 공화국에서 암기(공부) 잘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지금과 달리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암기 능력이 성적의 우열을 갈랐다 ―삶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왠지 지금의 삶을 불만족스럽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하하).
인출 훈련을 통해 외우고자 하는 한시를 일단 암송한 후 주기적으로 반복해 외우다 보면 외운 한시를 장기 기억으로 넘김과 동시에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그 자체로 심신 안정이 되어 이후의 다른 공부는 물론 스트레스 해소에도 적잖이 도움이 된다.『몰입』의 저자 황농문 교수가 추천하는 몰입 방법에 '단순 반복'이 있는데, 실례로 스님의 염불을 든다. 한시 암송도 그와 유사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인출을 통한 암기 훈련이나 단순 반복으로 몰입을 경험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초스피드 시대에는 왠지 뒤떨어진 학습법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 속에 고효율 대용량의 칩을 심거나 어떤 정화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 한 생물체인 인간이 자신의 뇌 속에 정보를 저장하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인출 훈련이나 몰입감이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杖策謁天子 장책알천자 / 채찍 잡고 천자를 배알하고
驅馬出關門 구마출관문 / 말을 몰아 관문을 나왔다
請缨繫南粤 청영계남월 / 오랏줄 청하여 남월왕 포박하며
憑軾下東藩 빙식하동번 / 수레 손잡이 의지해 제후(齊侯) 항복시키리
鬱紆陟高岫 울우척고수 / 꾸불꾸불한 높은 묏부리를 올라가며
出沒望平原 출몰망평원 / 보였다 가렸다 하는 너른 들을 바라본다
古木鳴寒鳥 고목명한조 / 고목(古木)에는 겨울새가 울고
空山啼野猿 공산제야원 / 공산(空山)에는 밤 원숭이가 운다
旣傷千里目 기상천리목 / 이미 천리 풍경에 눈이 상했는데
還驚九折魂 환경구절혼 / 또다시 험한 구비 길에 혼이 놀란다
豈不憚艱險 기불탄간험 / 어찌 험난함과 어려움 꺼리지 않을까마는
深懷國士恩 심회국사은 / 국사(國士)로 맞아준 은혜 깊이 품었기 때문
季布無二諾 계포무이락 / 계포는 두 번 허락함이 없었고
侯嬴重一言 후영중일언 / 후영은 한 마디 말을 중히 여겼다
人生感意氣 인생감의기 / 인생은 의기에 감동하는 것이니
功名誰復論 공명수부론 / 공명 따위를 누가 또 의논하는가
'술회(述懷)'의 중 · 후반부이다. 눈을 감고 내용의 큰 틀을 생각하며 나지막이 되풀이 외워보는데, 위징의 기상이 새가슴에 스며드는 듯하다. 이 또한 인출 암송에 몰입이 더해진 효과 아닐런지?
*이번 글은 '브런치'의 경고를 받고 작성한 것이다. 매우 부드럽고 다정하게 경고하고 있지만 의외로 매서운 경고로 느껴져 글을 아니 쓸 수 없었다. '브런치'의 경고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개개인의 내밀한 사정은 모르니, 어떤 때는 서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집에 우환이 있어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브런치'야, 좀 미안하지 않니?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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