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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를 보며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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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이하윤 시인의 '들국화' 일절. 나의 애송시 중의 하나이다. 시어와 내용 모두 평이해 좋아한다. 대상에 대한 얼마간의 따뜻한 마음도 느껴져서 좋다.


오늘 아침 출입문을 열고 나서니 제법 기운이 상량했다. 어이쿠, 드디어 가을이 오시는 건가?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여기저기 국화 무더기가 힘겨운 듯 허리를 구부린 채 눕기 직전 상태이다. 빈 틈새만 나면 이것저것 갖다가 심는 마나님의 솜씨가 발휘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마나님이 심은 국화는 들국화라 저리 널브러진 상태로 둘 수밖에 없다. 정리정돈 좋아하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 모습들이라 마음이 영 찜찜하다. 생각 같아서는 '확' 다 뽑아버리고 싶은데, 마나님과의 일전에 이길 자신이 없어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다.


시는 들국화를 좋아하지만 정작 들국화가 마당에 들어선 것은 꺼리고 있으니, 확실히 나는 이건 이것 저건 저것 구분을 좋아하는 취향인 것 같다. 애고, 야들아, 미안타. 너그들이 들에 있었으면 내 이리 짜증 섞인 마음 안 가질 텐데, 집 마당에 있다 보니 그리 됐구나. 속 좁은 주인아저씨 용서하려무나.


지난 일요일에는 모처럼만에 내외 외식을 했다. 날이 흐린 데다 기분도 우울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외식을 한 것인데, 일전 아이들과 함께 찾았던 중국 음식점을 다시 찾았다. 당시 처음 먹어본 유산슬 덮밥이 맛있어서 다시 한번 맛보기로 했다. 중국 음식점에 갈 때마다 으레 그렇듯 음식을 시키고 눈요기(?) 거리가 있나 살펴보는데, 마침 내가 외우고 있는 시가 눈에 띄었다. 오호, 이렇게 반가울 수가! 흡사 한참만에 만나는 정다운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秋叢繞舍似陶家 추총요사사도가 / 집 둘레 국화 가득하니 영락없는 도연명 집이로세

遍繞籬邊日漸斜 편요리변일점사 / 울타리 돌며 흠상(欽賞)타보니 어느덧 해가 저무네

不是花中偏愛菊 불시화중편애국 / 내 이 꽃을 편애하는 것 아니니

此花開盡更無花 차화개진갱무화 / 그저 이 꽃 지고 나면 다시는 다른 꽃 없기 때문이라네

*사진의 시에 사용된 한자는 간체자이다. 여기서는 번체자로 바꿨다.


원진(元稹)의 '국화'이다. 자신의 집 울타리에 국화가 만개하니 자신의 집이 유달리 국화를 좋아했던 도연명의 집 같다고 했다. 단순히 외견상 그의 집과 같다는 말만 한 것은 아닐 터이다. 자신 또한 도연명의 삶과 가치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일 터이다. 둘째 구에서는 집 둘레의 울타리를 흠상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은연중 도연명의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採國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을 모방했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꺾다가 / 문득 남산을 바라보네 / 저물녘 산기운 곱디고운데 / 새들은 짝지어 둥지로 돌아오네." 도연명은 이 시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속에 지고의 진리 숨은 듯한데 /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라고 했는데, 원진은 이 같은 유의 말보다는 약간 엉뚱한 말로 시를 마무리했다. "선비요 은사라면 국화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사모해야 하리."와 같은 말 대신에 "내가 이 꽃은 좋아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그저 이 꽃 다음에는 더 이상 볼 꽃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여 약간 심드렁하게 시를 끝맺었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심상한 표현으로 국화를 상찬 하기보다는 약간 뒤틀린 표현으로 국화를 상찬 했기 때문. 이 시가 과거 여타의 국화 시에 비해 높이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는 국화 핀 절기를 배경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원진의 시는 국화 그 자체를 상찬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진의 마지막 두 구절을 단순히 국화의 상찬에만 몰두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이 시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다른 꽃을 볼 수 없는 계절의 마지막 꽃이란 것은 그것 자체가 바로 선비의 올곳은 정신세계를 대변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결국 도연명의 시와 원진의 시는 표현만 달리했을 뿐 선비로서 가져야 할 지향점을 동일하게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글이 너무 길어졌네. 하여튼 이런 내용을 담은 원진의 시를 음식이 나오기까지 혼자 속으로 음미했다. 마나님에게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왠지 발설하면 감흥이 사라질 것 같아 그만뒀다. (어쩌면 도연명도 이런 심정 아니었을까? 자신이 본 풍경에서 흔연하게 다가오는 그 무엇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이 사라질 것 같기에 말을 꿀꺽 삼켜버렸던 것은 아니었을지?)


과거 국화는 지조 특히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었는데, 지금은 그와 달리 죽음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상갓집에서 으레 보는 꽃이 국화이다 보니 그리된 듯싶다. 국화와 죽음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원진이 시에서 표현했던 세상의 마지막 꽃이란 말을 상기하면 그다지 부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왠지 지조에서 느껴지던 국화의 쌉쌀한 맛이 썩기 직전의 물컹한 음식에서 나오는 큼큼한 맛으로 변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어제 마나님이 보았으면 환호작약했을 짤을 보았다. 김우창 교수의 삶을 21년에 걸쳐 찍었다는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예고편이었다. 마나님이 환호작약했을 내용은 김우창 교수가 한 때 길고양이 20여 마리를 길렀다는 것이었다. 생태주의자로, 주변 주민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를 그리 기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길고양이 엄마를 자칭하는 마나님이 보면 얼마나 좋아했으랴 싶었다.


김우창 교수는 생태주의자답게 정원의 수목과 화초들을 거의 숲을 연상시킬 만큼 울창하게 키우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혹 이 분이 국화도 키우고 계시다면 우리 마나님처럼 키우시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님이 만약 이 짤을 본다면 한층 더 자신이 가꾸는 자연주의(?) 정원관을 확고하게 가질 것 같아 '제발 우리 마나님이 이 짤을 보지 않기를!'을 간절히 기원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왠지 많은 이들의 입줄에 오르내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 간절한 기원은 물거품이 될 것만 같다. 아….


마당과 울타리 주변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짜증스런 국화 무더기들을 보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중에 문득 '저 국화들이 꽃을 피운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노오란 국화가 마당과 울타리 안팎으로 여기저기 피어있는 모습을 그려보니 제법 운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황량한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오면서 세상을 물들이던 초록의 융단도 이젠 칙칙하게 느껴지는 이즈음 노오란 색이 얼마간 풍성하게 마당과 울타리를 물들인다면 제법 산뜻한 느낌을 줄 것 같다.


생각을 이리 바꾸니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들국화가 갑자기 애틋하게 느껴졌다. 애고, 미안타, 야들아! 풍성한 가을빛을 전해 주려 애쓰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타박만 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미안쿠나. 어, 그러면 결국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마나님이니, 마나님도 칭찬해야 하는 건가? 그건 아닌데… 쩝.


조만간 집 안팎을 노오란 색으로 풍성하게 물들일 들국화를 위해 아부하는 시 한 수를 지어 보았다. 괜찮은 것 같다. 하하.


나는 집에 핀 들국화를 사랑합니다.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좁은 마당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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