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질문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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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린아이가 커다란 진흙탕에서 온몸에 진흙을 묻히며 놀고 있다. 그때 한 어른이 아이에게 다가왔다. 어른의 손에는 깨끗한 물이 들어있는 양동이와 수건이 들려 있었다. 어른은 말했다. “이제 깨끗하게 씻고 단정해져야 한단다.”
아이는 두 눈이 동글해져서는 어른에게 물었다. “왜 그래야 해요?” 아이에게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고 단정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른이 답했다. “그래야 네가 사랑받을 수 있단다.”
어른의 말이 아이 스스로를 위한 답이 아님을 아이는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어른의 눈이 피곤해 보였기에 더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는 자신 앞에 서있는 어른을 사랑했다. 아이는 주섬주섬 일어나 어른 앞에 다가갔다. “착하구나.” 어른은 아이의 몸에 묻은 진흙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때부터 아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려보는 것을 발전시켰다. 그럴수록 아이는 어른들의 긍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어느덧 아이는 자라서 동네에서 가장 어른스럽고 싹싹한 이가 되었다. 그런 아이에게 어른이 말했다. “이제 너의 길은 네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단다.”
아이의 눈은 다시 동글해졌다.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진흙탕에서 어른의 요청을 따라 나왔지만,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걸 아이는 삶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야 하는 과제 앞에서 아이는 좀처럼 짐을 싸지 못했다. 똑똑하고 싹싹한 아이인데도, 이상하리 만치 자신 앞에 마주한 선택이 어려웠다. 끈끈한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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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밀리듯이 아이는 겨우 길을 나섰다. 아이의 가방은 단출했다. 아이는 무엇을 챙겨야 할지 알지 못했다. 숲 속은 어두웠고, 아이는 어두움 속에 길을 잃었다. 아이는 라이트로 어둠을 밝힐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추울 때 담요로 몸을 녹일 수 있다는 것도, 배가 주릴 때 가볍게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체 하염없이 걸었다.
어두운 밤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아이는 무섭다고 느꼈다. 적막한 숲 속을 자신의 발자국 소리로 가득 메울 때면 아이는 외롭다고 느꼈다. 여전히 자신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때면 아이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까마득했던 어둠이 조금씩 걷혔다. 아이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경이롭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길을 읽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배고픔도, 추위도, 외로움도, 무서움도 아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감정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그걸 느끼고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 아이의 두 눈을 새롭게 뜨게 했다.
똑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고 느꼈는데, 어느 순간 아이의 발에 젖은 모래가 밟혔다. 질퍽하게 자신의 발을 잡아당기는 진흙 앞에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아이의 눈앞에 또 다른 어린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는 진흙탕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그 아이는 더러워 보였다. 철이 없어 보였다. 얼른 그 아이를 깨끗한 물로 씻겨주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정신없이 놀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얘야, 그만 이리 나오렴. 깨끗하게 씻자.” 아이는 들은 체 만 체하며 계속 뒹굴며 즐거워했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얘야, 단정해지는 법을 배워야지.”
그제야 들었는지 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그래야 해요?” 그 대답을 들은 아이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이 안에는 줄 수 있는 대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어린아이의 두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맑은 눈이었다. 이상하게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편안했다. 아이는 마주친 맑은 두 눈동자 안에서 한 동안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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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메고 있던 단출한 가방을 내려놓고,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깨끗한 모래 위에 올려두었다. 뽀얀 엄지발가락이 진흙 표면에 닿았다. 진흙은 차가웠고 끈끈했다. 짙은 갈색의 진흙이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어린아이가 다가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어린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는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다. 둘은 깜짝 놀라 눈을 맞췄고, 한동안 웃었다.
팔뚝에, 목덜미에, 양 볼에, 머리카락에 진흙이 묻었다. 진흙은 깊지 않았다. 미끌미끌한 감촉을 온몸으로 느꼈다. 누워도 보고 엎드려도 봤다. 손가락으로 진흙에 그림을 그리며 어린아이에게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것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진흙으로 동굴을 만들어보기도, 자신이 사랑했던 어른의 얼굴을, 어린 시절을, 나무의 열매를, 새의 날개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놀다가, 어느 순간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아이의 마음속에 반짝였다. 그 순간 자신은 혼자였고, 어린아이는 환상이며 길잡이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진흙탕 한가운데 누워 어린 시절 들었던 질문 앞에 다시 섰다. ‘깨끗하게 씻고 단정해야 할 이유는 뭘까.’
자신 앞에 놓인 신발과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피니 내리쬐는 햇볕 사이로 울창한 나무들이 보였고, 그 사이로 나있는 길이 보였다. 어른에게는 아직 가야 할 길이 있다. 예측할 수 없지만 그 길을 걸을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길을 나서는 어른에게는 어떤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