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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phan Seo Feb 07. 2023

우리의 삶은 충분히 나아지고 있다

팩트풀니스 '부정 본능(Negative Instinct)'을 다시 읽고

간만에 아무런 목적 없는 휴가를 썼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게 있었다기 보다는 머릿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비우고 싶었고, 비워진 생각의 통에 좀더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들을 채우고 싶었다.


최근 들어 다시금 '행복'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행복을 좇아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들 중에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왜 이리 적은 것일까. 나름 주기적으로 '행복'에 대해 재정의해보고 실제로 '행복함'을 느끼고 살고 있는 나조차도, 그 '행복의 양'이 해가 갈수록 점차 줄어드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4년 전에 읽었던 팩트풀니스를 오랜만에 다시 집어들어 '부정 본능(Negative Instinct)'을 찬찬히 다시 읽으며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저자 한나 오슬링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4년이 지난 지금 읽으니 더 공감이 많이 되었다. 인간은 애초에 현재의 행복 보다는 불안과 불행을 느끼게 마련인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의 삶에 대한 불행보다도, 이 사회 전반에 대한 불행을 다룬다는 점에서 책의 주제와 나의 고민은 조금 달랐지만 그럼에도 시사해주는 바가 충분히 있었다.




현재의 행복보다 불행을 더 느끼는 이유



1. 과거 미화


흔히들 지나간 일들은 지나치게 미화가 된다. 지나간 일들 중에는 분명 '불행'한 일들도 많았을텐데, 그래서 그 당시에는 불행하다고 느꼈을텐데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감정들을 사그라들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학업'이라는 속박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던 수험생 시절을 우리는 종종 그리워한다. '인간 존엄성'을 짓밟히며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던 군인 시절을 우리는 종종 그리워한다.


그렇다면 과거를 미화하는 이유는 뭘까? 과거를 떠올리는 현재가, 그 과거의 역경을 딛고 극복한 현재이기 때문에 그 과거가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과거의 역경을 딛고 극복한 현재라면, 행복 필터가 껴진 '왜곡된 과거의 아름다움'보다는 '실재하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더 만끽하면 좋을텐데... 현재에는 또 현재에 새로이 생성된 또다른 힘듦이 그 시야를 가리기 일쑤다. 참 까탈스럽다.


과거를 미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과거의 ‘젊음’이 마냥 그리운 탓일 수도 있겠다. 우리 사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화(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성숙해지고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신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화(퇴보)하고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신체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막연히 '예전이 더 좋았지'라는 푸념을 늘어 놓는 것 아닐까.


2. 언론


우리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는 점차 발전해고 있다는 것은 팩트이지만 애석하게도 점진적인 편이다. 아무리 규모가 대단하고, 수백만명에게 좋은 영향을 준 변화라도 이러한 점진적 변화는 신문 1면을 장식하기 어렵다. 반대로 일시적인 퇴보, 불행이 신문 1면을 장식하기 더 자극적이다. 나쁜 소식을 뉴스로 접할 때, 그것의 반대되는 좋은 소식은 전혀 보도될 거리가 아님이 자명하다. 30 명이 실종되고 사망한 소식은 뉴스감이지만, 30명이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는 소식, 새로 태어났다는 소식들은 뉴스감이 되기 어렵다. 즉 우리가 언론을 통하여 접하는 대부분의 소식들은 부정적인 내용이기 쉽다.



이에 더해 사회적으로 언론에 대한 규제와 탄압이 줄어들고, 기술이 발전하여 TV나 지면 기사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채널을 통해 더 많은 소식들을 접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소식들 위주로 전해주는 일종의 '고통 감지 센서'가 훨씬 많아진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3. 무지성인들의 지성인 코스프레


위 같은 언론 환경 속에서 과거 미화를 하기 바쁜 우리들은, 현재가 불행하다. 이를 더 활성화하는 것은 '현재를 비판하지 않는 삶'에 대한 지나친 경계도 한 몫 한다. 아무런 비판 없이 마냥 '좋아라'하는 삶은 무지성인처럼 보인다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허나 현대인들은 지성인처럼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늘어 놓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현재를 비판하는 삶'이 되진 못한다. 현재에 대한 명확한 메타인지 없이 막연히 늘어놓는 불평불만은 비록 '비판적인'것처럼 포장되지만, 결국 아무런 쓸모 없는 '비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이들이 언론과 커뮤니티의 댓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지성인 코스프레는 지성인처럼 보이기는 커녕 몰지각해 보이곤 한다.


명확하게 현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짚어내야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생산적인데, 부족한 부분에 대한 개선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적이고, 그간 이룩해놓은 발전과 성장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우리 삶은 실제로 좋아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직시했을 때 우리 삶은 좋아지고 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시시각각 체감은 어렵지만 매년 2%씩만 변해도 35년이면 2배가 변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할아버지 시대와 아버지 시대, 나의 유년 시절 그리고 현재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아기 때 나(91년생)는 지금 시대의 아기들 보다 훨씬 열악한 의료 기술 하에 태어났고, 유기농이니 뭐니 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들을 먹으며 자랐다. 수도권에 살았음에도 어릴 때는 허구한 날 모래 흙으로 가득찬 놀이터에서 놀았고, 부모님한테 연락을 해야 될 때면 근처 가게에 들어가 전화를 빌려썼다. 학창시절 학교 내에는 여러 부정부패가 존재했고, 학교/학원 선생님들의 체벌은 상당히 야만스러웠다. 대학시절 실내에서도 흡연이 가능하여 비흡연자들은 고통을 받았고, 진보의 요람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이었음에도 여학우들은 남학우들은 알지 못할 여러 불편들을 겪었다. 사회초년생 시절 생필품을 구매할 때 당일 배송, 익일 배송은 꿈도 못 꾸었고, 모바일로 계좌 송금을 하는 것도 상상도 못했다. 굳이 지금의 세대와 하나씩 비교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현재의 삶이 나아졌는지는 쉽게 이해가 된다.


비단 서른 두살인 나의 삶만 돌아봐도 사회는 좋아지고 있다.

하물며 저자의 삶(1948년생)과 비교는 더 극적이다.

그가 태어난 해(1948년)의 '스웨덴'은 현재의 '이집트'와 유사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태어난 해(1921년)의 '스웨덴'은 현재의 '잠비아'와 유사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유하고 있었다.


저자는 '삶이 좋아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를 여러가지로 제시해주었다. 여성의 투표권, 탈문맹, 안전한 상수시설, 아동 사망률, 1인당 이산화황 배출량, 영양부족 인구비율 등 직관적인 지표들을 나열해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데이터는 '1인당 기타(guitar) 보유수'의 추이였다. '삶이 좋아지고 있음'을 여러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배고프지 않은 것' 등등) 궁극적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내 삶에도 이를 대입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나의 삶은 좋아지고 있을까? 답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지고 있다.'였다. 먹고 싶은 메뉴로 끼니를 선정할 수 있는 자유, 마시고 싶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자유, 사고 싶은 옷과 신발을 살 수 있는 자유, 가고 싶은 여행지를 골라 갈 수 있는 자유 - 3년 전의 나와 비교만 해봐도 나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나에게 가장 쉽고 직관적인 바로미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는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자극적인 언론의 사회 불행 보도, 무지성적인 사회 비난의 만연함, 그 속에서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미화가 더해지면 '현재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망각하고 그저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팩트풀니스에서 말하는 '부정 본능'이다.


한나 오슬링이 이야기하는 '부정 본능'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수많은 요소들은 여기저기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처음엔 큰 행복으로 느꼈다가 그것이 지속되면 둔감해지고 당연해지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은 기본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준거집단이 확장되면서 느껴지는 '사회적 박탈감'은 현대인이 놓여있는 인프라(모두에게 열려있는 기회)의 특징 중 하나이다. (알랭드 보통 - '불안') 근본적으로는 쇼펜하우어가 '행복론'에서 이야기 했듯, 인간이 태생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두 종류의 고통인 '배고픔' 또는 '지루함' 를 극복하려면 '내면의 풍요(우정, 사랑 등)'를 좇아야 하는데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이를 방해하여 우리는 '물질의 풍요('물질 만능주의')'를 좇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룬 성취로 인한 행복감은 점차 줄어들고, 남과 비교하기 바쁘고, 밑 빠진 독과 같이 채울 수록 목말라지는 물질을 추구하는 삶이니.. 여간 쉽지 않은 여건이다.



행복해 마지않아야 할 우리네 삶이지만, 너무 많은 이유로 우리는 그 행복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행복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경주하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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