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택시 기사님도 피해자인데
이전 글 : 살아있어서 감사해 #1. 타고 있던 택시 앞바퀴가 갑자기 터져버렸다
11만 1,500원, 그날의 응급 처치 비용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받아두었던 택시 기사님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회사 택시였기에 타이어의 부실한 관리는 전적으로 회사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보험사로 청구하여 돈을 돌려받는 것이 모두에게 합당하고 이로운 처신이리라.
"괜찮으시다면 개인 의료 보험으로 처리하시고, 개인 대 개인으로 보상받아주셔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그분 아마 해고당하실 거고, 다른 택시 회사 재취업도 어려우실 거예요..."
두 번째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두 번째 택시 기사님이 하신 말씀이시다.
첫 번째 사고 현장에서 택시 기사님은 우리의 안전을 챙기면서도 "회사 짤리깄다"를 탄식하듯 말씀하셨었다.
"하이고마 한참 기다맀심더, 내가 내 번호를 주기만 해뿟고 승객분 번호를 받질 못해가꼬 ... 괜-찮습니꺼"
"아이고 괜찮습니다. 기사님이야말로 안 다치셨어요? 오늘 하루 쉬셔야 하는거 아닌지요."
회사 사무실은 월요일에 열기 때문에, 상황이 어찌될른지는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어 봐야 알 것 같았다.
우선은 (이미) 보험 접수 번호 없이 개인 의료 보험으로 지불을 마친 상태였기에, 기사님이 계좌 이체로 돈을 보내주셨다. 아무런 영수증 증빙도 요구하시지 않으셨고, 추가 비용에 대해서도 발생하면 말씀을 하시라 하셨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타이어 터진 것이 기사님 잘못은 아닌데... 정말 회사에 요구하면 기사님은 해고되시는 걸까?
다음 날인 토요일 오후에도, 그 다음날 일요일에도 기사님은 안부 전화를 주셨다.
우리의 건강을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 가장 크셨겠지만, 적정 수준에서 합의해 주기를 기대하시는 마음도 크셨을 것이다. 그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고 계신 것이 수화기 너머로 절절히 느껴졌다.
그렇게 월요일이 되었고, 점심시간 전후로 전화를 주셨다.
"그.. 타이어 펑크... 회사 보험처리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해고 절차를 안내해뿌네예... 아무래도 개인 간 합의로 진행해야겠심더.."
"아니, 이게 엄밀히 말하면 타이어 관리를 제대로 못한 회사 잘못인데, 기사님이 책임을 떠안는 건 아니죠."
"우야겠습니꺼.. 지도 먹고 살아야지예.. 월급이라도 받을라믄 안짤리고 회사 다니야지예.."
골치가 아팠다.
나의 특정 자산이 손해를 본 거라면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 금액을 받고 끝내면 그만이지만, 건강에 손상이 갔고 이게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교통사고는 후유증도 있다는데.. 개인 간 합의로 명확한 보상금액을 산정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더군다나 아픈 사람이 내가 아니라 와이프였다. 보상의 범주를 내 멋대로 줄일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었다.
여기에 기사님은 점점 동정에 호소하시기 시작했다. 본인이 70이 넘는 노인이고 이번에 회사를 짤리면 사실상 다른 택시 회사 취업도 어려운 데다가, 손자 손녀 둘을 키우고 있다고...
여러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우린 이번 교통사고에서 천운으로 살아남았다.
뭐가 됐든 이번 사고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치료 금액이 삶에 영향을 끼치는 큰 금액이 아니고서야 보상을 얼마를 받고 자시고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누군가는 굳이 너가 기사님의 사정을 배려해 줄 필요가 있느냐 묻지만, 그를 배려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이 큰 것이 사실인 걸 어쩌겠나. 배려해주지 않는 것이 배려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스트레스와 불행으로 내게 다가온다면 배려해 주는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기도 한 셈이었다.
기사님의 부탁을 받아 개인 간 합의로 이번 사고에 대한 보상을 마무리하자는 문자 메시지를 남겼고, 최대 50만 원 한도 내에서 치료를 받고 영수증들을 증빙하기로 했다. 기사님은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면서도, 혹여나 내가 말을 번복하진 않을지, 불안감을 조금 내비치시기도 했다.
"하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복받으실겁니더.. 근데 그게 50만 원 가지고 충분히 치료가 되겠습니꺼... 내가 그 이상을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마는.. 아내분 걱정이 되가지고..."
"네네, 저도 치료를 얼마나 더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염려 마세요. 그 이상의 치료비용은 청구드리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지금도 가끔씩 이때의 사고를 떠올린다. 떠올리면 그때의 공포감이 살짝 엄습한다. 정말 죽을 뻔했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제오늘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건강한 삶이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당장엔 정말 큰일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은, '살아 숨 쉼'의 가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또 달라진 것은,
귀갓길 야간 택시를 망설이게 되었고, 법인 택시보다는 개인택시를 선호하게 되었으며 (택시 앱 상에서 개인택시 필터를 걸 수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택시 뒷좌석에서도 안전벨트를 꼭 착용하게 되었다는 점.
아, 다행히 우리의 치료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총진료비는 약 48만 원 정도 발생했고, 영수증을 모두 첨부드린 이후 기사님은 50만 원을 맞춰 보내주셨다.
2만 원을 더 보태주신 부분에 대해 기프티콘이라도 보내드릴까 싶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때 그 택시 기사님도 무탈히 잘 지내실까?
이번 교통사고가 유난히 씁쓸하고 힘들었던 점은 사실 기사님도 피해자였다는 점. 택시 회사의 차량 관리 미흡으로 인한 직원의 교통사고, 그 가해자는 명백히 택시 회사라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응당의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피해자에게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였던 이번 사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마무리했지만 마음 한편이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다. 택시 기사님도 살아남았다.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로도 오늘의 삶에 감사할 이유는 충분하다.
부산에서의 어느 여름밤,
택시 교통사고 회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