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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Dec 22. 2016

나의 두발, 당신의 모든 것.

문득, 당신을 그리워하는 날에.

Cornwall Park, Auckland, 사진출처 : 이은주

지금 이 순간이 좋다. 커다랗고 초록빛의 나무 그늘 아래 누워있는 이 순간. 펼쳐진 공책에 나타난 찬란한 햇빛의 모습에 감탄하고,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고, 내 몸을 바람이 간질이는 이 순간. 잔디밭의 푹신함과 나의 검정 바지를 뜨겁게 만드는 햇빛의 강렬함과 바람이 불 때의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와 초록빛의 잔디와 이름 모를 하얀색의 작은 꽃들을 보는 이 순간. 작은 꽃들을 유랑하는 벌들과 나무 위에 오르며 노는 네 명의 청년들과 짧은 바지와 짧은 나시를 입고 햇빛에 몸을 맡기며 누워있는 멋쟁이 언니와, 눈을 감으며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소녀.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이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햇빛과 바람과 나무와 하늘과 잔디밭의 조화가 아름답다. 오랫동안 질리지 않을 이 풍경을, 결코 반복되지 않을 이 순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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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밭에 누웠다가 앉아있으며 이 순간을 즐긴다. 그러다 나의 두 맨발을 가만히 쳐다본다. 언제 내 발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내 두 발을 햇살에 따뜻하게 데워진 잔디 위에 둔다. 발톱을 자를 때와, 씻을 때에만 잠깐씩 관심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예쁘게 잘 있었다. 관심을 주지 않았음에도 어디 아픈 곳이 없이, 다친 곳 없이 잘 있어준 것이 괜히 애틋하며 기특하다. 기특한 두 발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문득 잊고 지냈던 순수한 물음 하나가 떠오른다. 과연 나의 발도 엄마의 발과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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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하고, 발볼이 살짝 넓은 것도 엄마의 것과 닮았을까. 나의 평범한 얼굴 중에는 무엇이 엄마와 닮고, 또 무엇이 닮지 않았을까. 나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도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일까. 발을 보다가 막을 수 없는 수많은 물음들이 그리움과 함께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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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의 닮은 점들이 궁금해지다가, 당신의 삶까지 궁금해진다. 나는 지금 이렇게 한없이 여유롭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당신은 한순간이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즐긴 적이 있었을까. 나처럼 맨발로 잔디밭을 느낀 적이 있는지, 햇빛에 드리워진 나뭇잎의 그림자에 감탄한 적이 있는지,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삶의 충만함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그저 당신으로서의 삶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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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신의 삶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가졌는데, 어쩌면 당신이 엄마가 된 시간을 내가 지나쳤을지도 모르는데, 이 잔디밭에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형체 없는 아련함이 북받쳐오지만 그저 홀로 삼켜낸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많은 것들을 홀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홀로 감내했을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슬픔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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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의 눈이나 코, 입술과 같은 형태나 당신의 목소리나 머리카락의 색깔 같은 것들을 하나라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워하고 싶을 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모습을 그리워하는 게 얼마나 막막한 일인지. 왜 아기였을 때의 기억들은 잡아놓을 수 없는 것인지, 괜한 나를 원망한다.

사진출처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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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나의 발을 본다. 역시나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당신의 발도 외딴 땅을 밟은 적이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걸었던 적이 있었는지, 도망쳐야 했던 적이 있었는지. 나의 손을 본다. 상상으로는 당신의 손을 본다. 사랑하는 이와 처음 손을 잡았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편지를 쓰는 것을 즐겨했는지,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지. 나처럼 담배냄새와 술 냄새를 싫어하고, 커피 향은 좋아하는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는데 여전히 슬픈지. 당신의 인생 중에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가장 무너졌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또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당신의 삶은 어떠했는지.

당신에게 미처 닿지 못하는 물음들이 허공에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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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맨발을 바라보다가, 내 두 발이 아주 작았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당신이 만져봤을 내 두 발 위에 손을 얹어본다. 미처 신경을 써 주지 못해도 잘 있어준 내 발처럼, 내 인생처럼, 당신의 인생도 안녕하기를. 언젠가, 그 언젠가 우리 함께 두 발을 나란히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실체 없는 당신을 끌어안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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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앉아있던 잔디밭에서 일어나 두 발을 신에 넣고, 다시금 내 길을 걷는다. 앞으로 나아간다. 내 두발이 당신의 앞에 섰을 때의 그 순간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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