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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Jan 11. 2017

신발끈

여전히 선명한 너의 고개 숙인 모습

2013, 사진 출처 : 정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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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린 신발끈으로는 오래 걷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해 스스로 걸려 넘어지거나 자꾸 신경이 쓰이므로. 오른쪽 신발끈이 풀렸다. 몇 발자국을 그 상태로 걷다가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피해 안쪽을 찾았다. 몸을 구부렸고, 아무렇게나 신발끈을 묶었다. 방금 묶은 오른쪽 신발끈은 반듯한 왼쪽 것에 비해 허술하다. 아마 금방 또 풀어질 것이 분명했다.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나도 합류했다. 수많은 발들이 움직이고 지나치는 와중에도 나는 내 발만 보았다. 거기, 왼쪽 운동화에 아직 너의 흔적이 있었다. 모두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목적지를 잊은 채 계속 걷기만 하는 걸 보니 아직은 아닌가 보다. 조금은 오래된, 그러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너의 작은 기억이 나의 길을 잃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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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었던 어느 날이었다. 너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나는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고, 너는 가족과 저녁 식사가 있었다. 친구를 만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고, 운동화를 사야겠다고 줄곧 생각했던 터라 신발가게에 들렸다. 너도 나를 따라 들어왔다. 나는 하얀 운동화를 이것저것 신어보며, 이거 어때? 괜찮아? 너에게 물었다. 사이즈 때문에 조금 고민을 했지만, 마침내 내 마음에 쏙 드는 하얀 운동화를 결정했을 때 너도 같은 걸로 사겠다고 했다. 내가 의아한 듯 너를 보니, 

“두 켤레를 사면 10%나 더 할인해주니까.” 

그렇게 우리는 커플 신발을 신게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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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연애였고, 나는 우리의 연애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떠도는 말이 많아지면 나보다 그가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으니.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나의 대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어올 테니 피곤할 일이었다. 또, 함께 일을 하니 우리의 관계 때문에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사내 비밀연애를 했으니, 커플 신발을 사도 마음껏 신지 못했다. 그는 새신을 잘 신고 다녔고, 나는 아침마다 새신을 신고 싶었으나, 누군가 알아챌까 다른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새신을 신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해 몇 번 신고 나갔다가 눈치 빠른 동료가 커플 신발 아니라며 할 때,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우연히 휴가가 겹쳐 함께 놀러 가게 되었을 때야 마음껏 커플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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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여름 휴가였다.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다. 어디가 좋을까 하다가,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그가 몇 해 전, 친구들과 놀러 간 부산 광안대교였다. 나도 부산에 가보고 싶어,라고 말했더니 우리의 여행지는 부산으로 정해졌다. 나의 첫 번째, 그의 두 번째 부산. 그 거리가 꽤나 멀었지만, 우리는 연애 초기였고, 그때의 연애가 대체로 그렇듯이 거리 따위는 문제 되지 않았다. 그 여행에 나는 당연히 커플 신발을 신었다. 그도 그 신발을 신었다. 며칠을 새신을 신고 그와 함께했다. 광안리도, 해운대도, 깡통시장도, 책방골목도. 그 신발에 우리가 갔던 부산 곳곳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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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나의 신발 끈은 자주 풀렸다. 그는 내 신발 끈을 보더니 이게 뭐냐며, 싫지 않은 타박을 했다. 그의 신발 끈은 아주 단정했고, 꽉 조여 있었고, 리본도 예쁘게 묶여있었다. 같은 신발이어도 다르게 느껴졌다. 나보다 족히 20cm는 더 큰 그가 나의 신발끈을 묶으려 몸을 구부렸다. 기꺼이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내 발에서 신발끈을 예쁘게 묶을 때 나는 숙인 너의 머리를 오랫동안 보았다. 그 뒤통수가 내게는 참 다정했다. 사랑해, 라는 말을 자주 했던 너였지만 그 순간은 말을 하지 않아도 너의 마음이 느껴졌다. 날 사랑하는 마음, 날 아끼는 마음. 다 묶고 난 뒤에 웃으며 일어나 다시 내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는 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그려진다. 네가 그때 묶어준 신발끈은 아주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지고 한참을 지나, 나 혼자 낯선 곳의 길을 걸을 때까지. 

2013, 사진 출처 : 정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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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아주 빠르게 멀어졌다. 그건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음을 안다. 그 정도만, 겨우 그만큼만 우리가 사랑했던 것이고, 함께 시련을 견뎌낼 힘이 우리에겐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보니 알겠다. 너와 이별한 후에 가끔은 네 생각이 났고, 또 생각보다 빠르게 나는 너를 잊으며 지냈다. 너의 흔적이 거의 없는 낯선 곳의 생활이 그것이 가능하게 했다. 그럼에도 너와 같은 신발을 신고, 너와 다른 길을 걷는 날이면 네 생각이 어김없이 났다. 

너는 잘 살고 있을까. 너는 나의 어떤 기억의 조각을 끌어안고 살고 있을까. 어쩌면 나를 완전히 잊고 지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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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끈을 묶느라 고개 숙인 너의 뒤통수가 여전히 선명하다. 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주었던 그 날들도 선명하고, 나로 인해 많은 눈물을 흘린 너의 커다랗고, 긴 속눈썹을 가진 너의 눈도 선명하고, 또 익살스럽게 웃었던 장난스러운 너의 표정도 선명하다.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하기엔 너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선명하다.

다만 흐릿한 것은, 널 사랑했던 그때의 내 모습. 불꽃처럼 화르르 사랑하며, 마음을 다 주었던 나는 이제 흐릿하다 못해 작은 불꽃마저 꺼졌으며 이제는 검은 그을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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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손길이 닿아있고, 여전히 잘 묶여있는 왼쪽 신발끈을 기어이 풀어버리고, 나의 방식으로 다시 묶는다. 아마 금방 풀릴 것이다. 너를 잊었다 해도 어김없이 너의 고개 숙인 모습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다정했고, 순수했고, 아름다웠고, 안타까웠던 우리의 사랑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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