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히 Jan 16. 2017

기억은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

선명하고, 흐릿하게


네가 좋아했던 책이었지, 싶어 손이 갔다. 읽으려고 펼쳐보니 그제야 내가 읽었던 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네가 좋아했고, 그래서 바로 책을 구매해 읽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면 나도 모두 좋아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네가 좋아하던 책을 찾아 읽고, 네가 좋아하던 낯선 음악도 찾아들었다. 심지어 평생 무서워 보지 않는 공포 영화도 영화관에서 봤었는데. 네가 좋아하는 거면, 나도 좋아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라도 너와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땐.

수많은 네가 떠올랐다. 씁쓸한 기분으로 책을 닫았다.

-

이미 읽었던 책이라는 사실보다도, 책의 내용보다도, 내게는 그 책이 네가 좋아하는 책으로 각인이 되어버렸다. 이미 많은 것들이 그러했다. 지나가다 보는 음식점은 그곳의 음식이나 분위기가 아닌 너와 함께 갔던 곳,으로 먼저 떠오른다. 보이는 모든 것이 너와 함께 걷던 거리, 너와 함께 봤던 영화, 너와 함께 갔던 곳으로. ‘너와 함께’ 혹은 ‘네가 좋아했던’이라는 수식어로.


너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모든 것들의 진짜 의미는 사라진 채, 그렇게 ‘너’만 남겨진다. 그것이 내겐 모든 의미가 되어 버린다.


-

이렇게 기억은 한동안은 너만을 떠올리게 한다. 끊임없이.

책 한권만 하더라도, 네가 좋아했던 책들이 떠오른다. 네가 군대에서 봤던 책 이야기가 떠오르자, 우리가 그 이야기를 했던 통닭집이 떠오른다. 그러자 너의 집과 가까웠던 그 통닭집에 자주 갔던 사실이, 그 통닭집에서 너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던 거리가, 너의 집 앞에서 버스나 택시를 기다렸던 일이, 헤어지기 아쉬워 너의 집과 가까운 하천을 걸었던 일도, 그 하천을 걸으며 들었던 물소리가 떠오른다. 끝도 없이.  

끊임없이 너와 함께 했던 기억은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올라 이내 슬퍼진다.

-


잔인한 것은 너인가. 나의 기억인가.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너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들인가. 이제는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인 것 같다.


2017, New Zealnad, 사진출처 : 정승희

-

끊임없이 네가 떠오르는 것이 가장 잔인하고, 괴롭고, 아픈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그런 너를 잊는 일. 잊히는 일. 너와의 추억과 기억들이 희미해지는 일. 그것이 끊임없이 널 떠오르는 것보다 더 속을 쓰리게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이제는 널 정말 사랑했던 적이 있었나,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들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의 사랑했던 우리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너와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영영 사라지게 될 것 같아서. 쓸쓸하고, 아련했다.


사랑했던 순간을,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다는 것이 더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보이는 모든 것들마다 네가 생각이 났던 그때에는.


-

기억은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

한때는 너무도 선명하게. 또 그 후에는 너무도 흐릿하게.

작가의 이전글 신발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