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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Jan 23. 2017

화상

울긋불긋한 손과 마음

2017, New Zealand, 사진출처 : 이은주


일을 하다가 손에 커피를 쏟았다. 뜨거운 물까지 함께 쏟았는데 당연하게도 무척이나 뜨거웠다. 괜찮은 척 일을 하려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그제야 흐르는 물에 손을 맡겼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바로 흐르는 물에 씻고, 얼음으로 찜질을 해야 했었는데, 괜찮은 척하느라 금방 나을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 데인 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따끔거렸고, 얼음에 대지 않고서는 너무 아파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결국 일하는 도중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터라 사장님은 깜짝 놀랐다. 내 손을 자세히 보시고는, 얼음 팩을 만들어 주었다. 앉아서 쉬라고 했지만, 나는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뒷문에서 한참을 울었다. 마침 하늘도 같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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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손이 데인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다. 옛 연인과의 관계에 속상하고, 서럽고, 어찌 못할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지나간 시간들과 현재의 감정이 한데 엉켜 나조차도 무슨 감정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쿡쿡 찔려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카페 뒷문에 쭈그려 앉아 차가운 얼음을 대고 있자, 절로 그 사람 얼굴이 아른거렸다. 잠을 자지 못한 것도, 내 마음이 아픈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만이 나의 마음을, 나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동시에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준 이도 그 사람이었다. 

원망조차 하지 못하게. 미워할 수조차 없게. 


결국 조퇴를 하고,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손도, 마음도 너무도 쓰라려 아픔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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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엔 내게 상처가 되었던 사람이, 내가 아프다고 하자 누구보다도 걱정을 쏟는다. 관계란 이런 것이고,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이 상처이자 치유가 되는 것. 슬픔을 껴안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 위안에 괜찮아지는 것.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는 것. 




아주 긴 잠을 잤다. 아침이 되자, 전날 그렇게 얼얼했던 손이 오늘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여전히 빨갛고, 여기저기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손이 물에 닿으면 소스라치게 따갑지만, 그럼에도 전날보다 괜찮아졌다. 어디론가 도망쳐 숨고 싶고, 눈물을 왈칵 쏟았던 마음도 아침이 되자 꽤 괜찮아졌다. 손이 완전히 나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나아질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에 아픔이 가셨다. 마음의 우울함도 멀리 가버렸다. 

슬픔의 유효기간이 짧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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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손에 연고를 정성스레 바른다. 아픔을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고, 일그러진 손에게 사과를 한다. 다음번에는 아플 땐 괜찮은 척하지 않으리라, 다짐도 한다. 뜨거운 물이 손에 쏟아지면 아픈 것이 당연하고, 소중한 이와의 관계에서도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아픈 것이 당연하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는 나중에 더 크게 아프게 된다. 

아플 땐 아픈 만큼 아파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더 다치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 손도,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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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쯤 웃고, 한 번쯤은 우는 삶을 산다. 썩 괜찮은 삶이다. 너무도 힘겨운 날엔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마법의 주문을 걸며 잠에 청한다. 그다음 날이면 신기하게도 마법의 주문 덕분인지 전날보다 괜찮아져 있다. 울긋불긋한 못난 손을 바라본다. 데이고, 물집이 잡히고, 터진 물집은 피부가 벗겨졌고, 발갛게 부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아주 큰 쓰라림은 없다. 내 마음도 열어 볼 수 있다면 지금의 내 손과 같으리라. 상처에 금이 가고, 찢기고, 곪은 곳도 있겠지만 오늘은 눈물을 왈칵 쏟을만한 아픔은 없다. 슬픔에 머무는 날은 하루면 충분하다. 다친 손으로 씻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글을 쓴다. 여전히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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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며 파란 하늘과 거짓말 같이 하얀 구름들을 마음에 담는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미소도 마음에 담는다. 싱그러운 초록빛의 나뭇잎도, 햇빛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 모를 보라색의 꽃도 마음에 담는다. 날 걱정해주는 이의 예쁜 마음까지도 차곡차곡 내 마음에 담는다. 사람에 데인 내 마음은 상처투성이지만, 여전히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넘쳐난다. 그 아름다움을 차곡차곡 담다 보면, 어느 순간 아픔은 사라진다. 이렇게 하루를 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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