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당신입니다
백지입니다.
한참을 백지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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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를 이제 글로 남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미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도 하얀 종이 위에 적어놓았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날들, 내가 좋아했던 당신의 모습들, 내가 싫어했던 당신의 모습들, 나만 알고 있는 당신의 버릇들도 모두 하얀 종이 위에 적었습니다. 사랑했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잊고 싶다는 말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말도, 끝내 잊히는 것이 두렵다는 말도 당신에게 직접 전하지는 못한 채 애꿎은 종이 위에 열심히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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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당신이, 당신의 흔적이,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내가 가진 종이마다 적혀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 문장으로, 다른 날에는 몇 장의 페이지로. 언젠가는 기쁨으로, 다른 날에는 슬픔으로. 종이를 가득 채운 수많은 글자들을 보다가 그만 내가 짠해 이제는 당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만 당신을 놓아도 되는 날이 온 것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지 않는다고 하여, 당신의 생각까지 나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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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지입니다. 여전히 백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당신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크나큰 결심을 했습니다만, 백지입니다.
하얀 종이를 두고 무엇을 써야 할까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끝내 떠오르는 것은 당신입니다. 수없이 많이도 당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는데, 당신을 향한 나의 감정들을 적었는데, 그럼에도 당신만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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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종이 위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내겐 당신이 종이 위에 나침반이었습니다. 당신만 있으면 나는 길을 잃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매일을 당신을 생각했고, 당신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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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겁이 납니다. 당신의 이야기로는 하얀 종이가 검은 글자로 가득 찰 때까지 몇 장이고 썼는데, 당신을 제외하니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두렵습니다. 이제야 정말 당신이 나의 전부였다는 것을, 나의 모든 생각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내가 당신의 이야기가 아닌 글을 쓸 수 있을지, 아니 당신이 없는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막막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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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랫동안 백지를 두고, 끝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이렇게 또 당신을 써 내려갑니다.
결국 당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