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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Dec 27. 2017

말괄량이 스물다섯, 다정한 스물여섯

애써 외면하고 싶은 숫자들이 많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이제 그 숫자들도 닳고 달아 겨우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내게, 우리에게 2017년이 딱 그만큼만 남은 것이다. 몇 백 개의 날들이나 있었는데, 계절이 바뀌기를 몇 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를 몇 번, 마음을 내어주다가 상처받기를 몇 번,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또 몇 번, 보고 싶은 이들을 보기를 몇 번, 왈칵 눈물을 쏟기를 몇 번 하고 나니 겨우 열흘이 남았다. 한 해의 끝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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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열흘 남짓 남았고, 내겐 스물다섯이 딱 그만큼 남았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돌아올 2018년을 손꼽으면서,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생각해본다. 또한,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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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짝꿍과 함께 원주에서의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이 와서, 길이 꽤 미끄러웠고, 겨울이라 해는 빨리 져, 수묵화처럼 보이는 풍경들을 뒤로한 채 춘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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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짝꿍과 고속도로를 달릴 땐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 세상에 우리 둘 뿐인 느낌. 한 없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 둘만 유영하는 느낌. 어쩌면 우리 둘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별들이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 평소에 느낄 수 없는 그 이상한 기분을 나는 좋아한다. 그럴 땐 정말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나와 그가 하나의 둥근 실로 묶여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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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둘 만의 공간에서, 노래를 열창하기도 하고, 낮에 봤던 공연의 소감을 주고받기도 하고, 우리 둘만이 아는 농담을 하며 웃기도 하고, 함께했던 지난 7년의 시간 중 어느 한순간을 끄집어내어 그날의 우리로 돌아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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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나도, 짝꿍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그가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세상이 잠깐 멈추었고, 그 찰나의 시간에 눈물은 발끝에서 눈 밑까지 차올랐다. 어느 한 기억과 오버랩이 되었다. 영화처럼. 마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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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춘기였을 때, 아니 그전부터 나는 남몰래 소망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나라는 사람은 슬픔이 너무 많고, 어둠과 너무 가깝게 지내서 사랑을 받아 밝고, 환하게 빛나는 아이를 가까이하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동경하기만 했었던 적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는 사랑받은 티가 난다고, 웃을 때에도, 말을 할 때에도 어쩜 사랑스러운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과, 그렇게 과연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동시에 들었다. 상처받는 일에 익숙했던 소녀가 이렇게 어른이 되어 사랑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이란. 긴 터널을 겨우 지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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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의 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나의 짝꿍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조금 뻔뻔하게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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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열흘 후면 스물여섯이다. 스물여섯의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앞으로의 나는 어떤 사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전부터 우아한 어른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내가 짝꿍에게 ‘나 우아하지는 않아?’라고 되물으니, 푸하하하 웃는다. 우아하기보다, 말괄량이의 느낌에 더 어울린다고 한다. 스물다섯엔 말괄량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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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함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품성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땐, 우아한 사람이고 싶다. 스물여섯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나 홀로 다짐을 한다. 정이 많은 사람. 지나가는 계절에 정을 주고, 내 사람들에게 정을 주고, 길고양이들에게 정을 주고, 내가 미워한 사람에게 정을 주고, 좋아하는 것들에도 왕창 정을 주고, 낙엽에도, 길에도, 내 가게에도, 손님에게도, 책에도, 글에도, 지나가는 눈길에도, 모두 정을 주어야지. 정을 너무 많이 주게 되어 아픈 일들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도도하여 나 혼자만 아는 사람 말고, 조금 여유롭게, 옆 사람에게, 세상에게, 하늘에게, 밤에게, 새벽에게, 아침에게, 글씨에게, 나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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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느껴지는 숫자들을 조금 놓아버리고, 앞으로 남은 열흘을 짝꿍이 말한 것처럼 말괄량이로 살고 싶다. 가장 어린 나이인 만큼, 어리게. 즐겁게. 어리광도 부리면서. 올 한 해도 잘 살아왔다, 토닥이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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