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행이 가고 싶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디에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는 지다. 30대가 된 후 여행지에 대한 감흥은 줄어도 누군가가 채워주는 감흥은 몇 배가 됐다. 어디든 결이 맞는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이 좋다.
'누구와 이런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상상을 더 많이 한다. 한번 가 본 여행지라도 상관없다.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같은 장소라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된다.
20대 때는 달랐다. 그때는 '여행지'에 더 무게감을 뒀다. 국내든 해외든 가보지 못한 곳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설렘이 더 컸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 자체가 주는 도파민이 있었고, 그 여행지에 대한 '로망'도 나름 있었다. 그런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 도장 깨기를 하듯 여행을 다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행이라기보다는 '자유 관광'에 가까웠다. ‘내가 언제 또 여기 와보겠어?’라는 마음으로 돈과 시간을 쪼개 쪼개 도장 깨기를 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은 주변에 여행을 함께해 준 친구들이 많았다는 거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 여행 계모임도 있고, 국내 여행을 1년에 1~2번 함께 갈 수 있는 대학 동기들과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 모임도 있다.
특히 여행 계모임 친구들은 10년이 넘도록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다. 쫌쫌따리로 곗돈이 쌓이면 우리는 1년에 한두 번은 꼭 함께 어디로든 일상을 벗어나 훌쩍 떠났다.
물론, 그 친구들과 처음부터 여행 스타일이 잘 맞았던 건 아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꽤 투닥거리는 순간도 있었고, 서로 '여행 스타일 진짜 안 맞아', '다음에는 안 가야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친한 친구랑 여행 가지 마라'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와닿았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연례행사처럼 그 친구들과 여행을 가지 않으면 마음이 찝찝하고 허전하다. 여전히 여행 스타일이 100%로 맞지 않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지점을 찾은 듯하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감정을 짐작할 만큼 친밀도가 깊어진 관계가 된 덕분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여행 계모임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파워 J인 총무 'L'의 기획력과 우리 중 유일한 E 'O'의 추진력이 좋은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사람 덕분에 무임승차 여행(?)이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 됐다.
두 사람이 알차게 짜놓은 계획 틀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면 된다. 영어 소통도, 정산도, 길을 찾는 일에서도 나의 역할은 없다. 고작 내가 하는 거라고는 계획 짤 때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1~2가지를 요청하고 비행기를 예약하는 것, 사진 찍어주기 뿐이다. (지나친 무임승차에 친구들에게 가끔 대차게 혼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잘 품어준다. 내가 생각해도 혼날만하다. 아직까지 같이 데려가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감사하게도 'L'과 'O' 말고도 내 주변에 꽤 그런 유형의 친구들이 모임마다 1~2명은 꼭 있다는 거다. 그런 행운의 무임승차 여행을 다닐 때마다 ‘아! 내가 인복이 있긴 있나 보다’ 새삼 느낀다. 그런 친구들 덕분에 말도 안 되게 '가심비' 넘치는 여행을 이곳저곳 다닐 수 있었다.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의 무임승차' 여행은 지난 2023년 여름에 다녀온 유럽 여행이다.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인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Y 언니가 여름휴가 때 놀러 오라는 말에 나는 그 기회를 덥석 물었다.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Y 언니 덕분에 마치 친구가 자취하는 동네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여행을 다녔다. Y 언니의 프랑크푸르트 자취방에서 머물면서 편안하게 독일의 구석구석을 구경했고, 렌터카를 빌려 독일 근교의 성투어와 프랑스 소도시도 당일치기로 여행할 수 있었다. Y 언니가 없었다면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여행 내내 Y 언니는 여행 가이드 역할을, 통역사 역할을 묵묵히 해줬다.
무엇보다 유럽여행에서 나를 구원해 줬던 건 Y 언니가 만든 음식들이었다. Y 언니 자취방에서 삼겹살, 라면, 직접 담근 파김치와 오이소박이 등 유럽에서는 귀한 한식을 먹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음식들이 없었다면 느끼한 음식에 취약한 내가 무사히 유럽 여행을 마칠 수 없었을 거다.
혼자 다시 13시간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Y 언니에게 장문의 카톡을 쓰면서 눈물이 터졌다. 여행 중 몸이 아파서 민폐를 끼쳤던 일부터 여행 내내 나를 챙겨주느라 바빴던 Y 언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박 8일의 유럽은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요즘 나의 소소한 낙은 다가오는 여행을 기다리는 거다. 다가오는 여행 일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된다. 이번 여행을 우리에게 어떤 걸 남길까. 또 어떤 행운이 찾아올까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