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17
살던 곳에서 두 시간 남짓 걸려서 도착한 공단이 밀집한 어느 도시, 미수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 짐을 잠시 내려놓고 이력서를 펼쳐본다.
이름 : 임미수
나이 : 21세
키 : 159cm
몸무게 : 44kg
이전거주지 : 부산 XX 보육원
특이사항 : 장애등급 2급 (청력장애)
학력 : 고등학교 검정고시
자격증 : 워드프로세서 2급
여러 곳에 지원하고 나서야 겨우 잡게 된 면접기회, 기숙사 제공에 월에 6회나 쉴 수 있어서 좋은 조건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미 중간에 짬짬이 벌어놓은 돈도 거의 다 바닥나서 이곳이 아니면 또 다른 일을 찾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공장이 일손이 모자라서 공정 마지막의 조립과 패키징 하는 일을 하기로 하고 면접 이후 곧 출근을 할 수가 있었다.
"야 태수야 일로 와바라 니 하고 비슷한 애 왔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작업장에 있는데 작업반장이 비실비실 웃으며 물류팀의 태수 씨를 부른다. 친구를 만들어주기에는 나이차이가 다소 났다. 나는 이런 어색한 경우를 꽤나 겪었다. 나는 태수 씨와 함께 작업반장에게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 회사는 외국인 깜둥이도 많고 부모 없는 애들도 많고 복지 시설인가 봐? 응? 우리 같은 천사 회사가 어딨을까? 그렇지?"
나는 이런 반응에 익숙했다. 부모도 없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등신 중에서도 상 등신이라고 길을 걷다가 발에 차이거나 돌에 맞은 적도 부지기수였고,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학교에서는 대놓고 나와 같이 짝을 하는 것도 피하게 되는....... 나는 이 사회에 놓인 계급 중에서도 가장 아랫것에 속했다. 나를 조롱하는 입모양과 표정을 보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는 못 알아보는 척 먼 곳을 향해 초점을 고정하였다. 이곳은 최소한 돌은 날아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태수 씨의 표정에는 다 보이고 있었다. 멋쩍게 웃고 있는 입모양이지만 눈매는 저 반장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특근에 잔업까지 나는 소형 블루투스 라디오와 GPS 부품 제작에 마무리 작업을 담당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다. 사장 사모님께서 내가 일도 열심히 하고 한자까지 곧잘 쓰는 것을 보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어릴 적 시간 날 때마다 보육원 근처에 있는 절에 가면 스님들이 한자를 가르쳐주셨다. 바닷가가 보이는 절에서 한자를 쓰면 마음이 편안했는데 이렇게 큰 장점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일한 지 1년도 안되어서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업무를 변경하였다. 인두와 거친 노끈에 장갑을 껴도 손에 상처가 많이 났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이 타자를 치면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보육원에 남아있는 동생들과 선생님도 기뻐하셨다. 돈이 얼마큼 모이면 선물을 사서 보육원으로 가볼 생각에 기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생산직에서 일할 때 작업반장은 나 혼자서 작업을 할 때면 그 특유의 비실비실한 웃음을 지으며 살며시 다가와 나의 어깨와 허리를 더듬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면 '격려해 주려고 그랬지~' 이러면서 정색하다가 다시 실실 웃으며 작업장을 떠났다. 들어보니 작업반장 때문에 그만둔 여직원들이 상당하다고 하였다. 그래서인가 사모님께서도 나름 배려차원에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를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변경시켜 주신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마감일 때문에 혼자서 야근을 하던 그때 작업반장이 잔뜩 취해서 내가 혼자 일하는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잠시 일어나서 인사하고 일을 계속하는데 갑자기 나에게로 다가왔다.
"야 임미수 사무실로 가더니 이제는 나한테 인사도 제대로 안 하네? 웃겨 아주..... 너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야 된다 너? 너 귀머거리라고 사장님이 안 뽑으려고 했는데 내가 추천해서 들어온 거야 알아!? 나한테 은혜 갚아볼 생각 없어?"
갑자기 나무껍질처럼 거친 손아귀가 나의 블라우스를 뚫고 들어왔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지를 수가 없었다. 작업반장은 나의 저항을 뿌리치고 속옷을 벗기려고 하였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과 모니터들이 바닥에 와장창 쏟아지고 나와 작업반장도 함께 쓰러졌다. 육욕을 채우기 위해 달려드는 작업반장의 모습은 마치 악귀와 같았다. 바닥에 넘어진 순간 나의 시야에 작업용 납땜인두가 보였다. 생산직에 있을 때 쓰던 오래된 인두였는데 추억이 있어서 사무실에 가지고 올라온 것이었다. 있는 힘껏 인두를 잡아 뾰족한 부분으로 내 옷을 벗기던 반장의 팔을 찍어버렸다.
작업반장은 인두가 박힌 팔을 부여잡으며 괴성을 질렀고 나는 그대로 사무실을 도망쳐 나왔다. 소란이 벌어지자 사무실 앞에 작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반쯤 벗겨진 나의 상의를 보면서 작업자들은 사태를 직감했고 평소 작업반장을 죽이고 싶어 했던 태수가 두 눈에 살기를 띠며 반장을 끌어내자고 소리 질렀다. 그때 미처 팔에서 인두를 뽑지 못한 반장이 작업장으로 나타나서 태수의 옆에 서있는 나에게 소리를 쳤다.
"야 저 부모 없는 년놈들이 나보고 좇되 보라고 작당한 거야 저년이 나한테 꼬리를 친 거라고!! 저 새끼들이 은혜도 모르고 애미애비 없는 더러운 자식들!"
태수의 표정은 세상에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옆에 있는 연장을 들고 덤비려고 하자 사람들이 연장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태수는 맨몸 그대로 작업반장에게 달려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반장보다 더 체격도 힘도 좋았던 태수는 짧은 순간에 반장을 초주검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갑시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저앉은 나에게 태수가 와서 여길 나가자고 하였다. 나는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와 태수 씨의 얼마 안 되는 짐은 금세 태수의 트럭에 채워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수는 누군가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더니 곧장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나와 태수는 공장에 혼란을 뒤로 한채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우선 평범하게 돈을 모아서 내 집부터 사겠다는 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