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단편소설]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8

by 서울길

1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일 년간의 학사일정도 끝이 났다. 쌀쌀한 겨울의 시작과 함께 기숙사 친구들은 계절학기를 듣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 기숙사를 떠나 본가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 아빠에게 연락이 오면 왜 첫째를 닮아서 이기적이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동생에게 오는 문자도 답장 보내는 것이 점점 느려졌다.


다행히 유경 언니는 활동을 위해서 서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본가로부터 지원이 꽤 괜찮은 언니와 달리 나는 서울에 있기 위해선 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기존 알바 외에 과외도 구해서 어떻게든 살아가기로 했다. 더구나 2, 3학년이 되면 기숙사 입소가 더 치열해질 거라고 들었다. 점점 치솟는 물가는 대학가치곤 비싼 이 동네 삶의 수준을 더 팍팍하게 만들었다. 학생들끼리 푸념하길 본가가 서울인 것도 큰 특혜이고 스펙이라는 말이 돌았다.


군대에 갔던 주호가 휴가를 나왔다. 군대에서도 휴대폰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아주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요즘은 군인이 더 돈이 많다면서 데이트를 하자고 하자고 한다. 요즘 군대는 정말 좋아진 것인지 주호는 입대 한 이후 살이 좀 쪄서 왔다. 주호와 영화도 보고 간단히 저녁 먹고 기숙사로 늦게 들어가는데 주호가 꼭 기숙사 앞까지 바래다준단다. 망설였지만 방학기간에는 보는 사람도 많이 없을 테니 학교 구경도 할 겸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주호가 집으로 돌아가고 기숙사 문 앞을 지나가는데 못 보던 차가 창문이 열린 채 서 있었다. 내가 지나가자 익숙한 단발성 목소리가 웃음소리와 섞여서 들린다.


"남자친구야?"


놀라서 뒤돌아 보니 수연언니가 차에서 나와 있었다. 몇 개월 전에도 느꼈지만 3년 정도의 시간 동안 언니는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학생보다는 전문직 직장인 또는 사업가, 너무 갑작스럽게 본 지라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데 언니가 말한다.


"차에 타. 가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언니가 모는 차는 빠르게 학교를 벗어났다. 평소에 아빠를 그렇게 욕하더니 정작 본인의 말 습관은 아빠를 그대로 닮았다. 아빠도 우리를 데리고 어디로 갈 때 목적지도 안 말해주고 그냥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늦은 밤에는 차가 막히지 않았고 언니가 운전하는 차는 빠르게 대학가를 벗어났다.


"뭐야..... 이렇게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다가, 그때 호텔에서는 왜 말도 없이 간 거야?"

"몰라도 돼, 너야말로 거기에는 왜 간 거야?"


언니의 단호한 말투에 할 말을 잃고 바깥 창문을 보았다. 한강을 따라서 빠르게 가로등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본 언니지만 이렇게 스쳐 지나갔던 가로등과 같이 시간은 빨리도 갔고 한 공간에 있는 언니와의 대화 자체는 어색하지 않았다. 단지 어색하게 다가왔던 건 완전히 달리 보이는 언니의 겉모습과 느낌뿐, 언니와 나는 한동안 도시를 가로지른 뒤 꽤나 고급져 보이는 오피스텔로 들어섰다. 카드로 찍어야 들어갈 수 있는 몇 개의 문을 지나쳐야만 비로소 언니가 사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언니가 사는 집은 복층 구조의 오피스텔이었고 내부가 정말 화려했다. 주변의 배경이 완전히 달라진 언니를 보니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도 거기에 있기 싫었지? 그래서 독하게 공부해서 서울로 온 거 아냐?"


언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거실에 의자에 앉자마자 말했다. 오래간만에 가족 중 일부를 만났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반가움과 짜증이 섞인 표정, 우리 집 그 까만 창고에서 보았던 어둠 속에서 짙어지는 그 표정이 보였다. 나도 한숨을 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언니를 다시 만나게 된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결말이 뻔히 보이는 허탈함이라고 해야 할까?

대화를 해보니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언니는 그 집과의 인연을 끈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빠가 아무리 미워도 불쌍한 엄마와 동생이 있으니 눈 한번 딱 감고 찾아가 보자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언니는 냉담했다.


"우리는 최태수 욕망의 부산물일 뿐이야. 나도 안타까워, 하지만 우리 집안은 비극으로 끝날 거야."


오랜만에 본 언니이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무겁기만 하였다. 다니던 학교는 졸업했냐고 묻자 그런 건 알 필요 없다고 했다. 점점 이런 빡빡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또 머리가 살살 아파오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런 나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때 호텔에서 봤을 때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기억을 되새기며 지인이 하는 병원을 소개해줄 테니 빨리 가보라는 말을 하였다. 한동안 말없이 적막이 흘렀다. 언니의 생활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뭔가 이곳과는 안 어울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게 뭐야? 일할 때 필요한 거야?"


"아니. 납땜용 인두인데 나 학교 입학하러 서울 올라갈 때 엄마가 준거야. 좀 어이없었어. 첨에는 호신용인 줄 알았다니까."


작업실에 있어야 할 거 같은 납땜인두가 왜 언니 방에 있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되었다. 언니는 이과생이라 준 것일까? 가냘픈 체격의 엄마가 썼다고 하기에는 저 인두는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래도 그때부터 조금 분위기가 풀어져서 한결 대화가 부드러워졌다. 세 남매가 자주 가던 분식집, 그리고 엄마와도 어울려서 종종 다녔던 곳들도 이야기하였다. 나의 손이 다시 따듯해졌고 독기를 품던 언니의 표정도 많이 누그러졌다.


"아까 그 남자, 썸이야 아님 남자 친구야? 머리 짧은 거 보니까 휴가 나온 군인인 거 같던데."


아르바이트할 때 날 쫓아오던 사람이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오~ 하며 놀란다. 너 같은 시골티 팍팍 내는 여자한테도 남자가 붙다니 하면서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너 사귀든지 아니면 나중에 결혼을 하든지 간에 절대 만나면 안 되는 남자가 있는데 뭔지 알아?"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언니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자격지심이 심한 남자를 만나면 안 돼, 물론 여자도 그럼 안되지 근데 남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보이면 결국엔 끝이야. 근데 의외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한테도 꽤 보이는 게 한국인 종특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냐고 묻자 대답한다.


"지겹도록 많이 봤잖아. 최태수...... 그 인간이 평소에 그렇게 행동하고 다니는 게 자격지심에 절어서 매일 열폭하는 거야. 그럼 그 주변은 다 망해."


또 시작된 독기 어린 비난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밤이 너무 늦어서 이제는 돌아가야 했다. 언니가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지만 도저히 적응이 안 될 거 같았다.


"택시 불렀고 계산까지 다 했으니까 그거 타고 가. 그리고 나 봤다는 거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절대로, 특히 최태수가 여기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너하고 인연도 끊어버릴 거야. 반드시 지켜."


알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한 뒤 언니의 오피스텔에서 나가는데 언니가 갑자기 또 불러 세우고 말을 했다.


"그리고 부탁할 게 있는데 그때 호텔에서 줬던 명함, 어디 다른데 흘리지 말고 찢어서 버려주었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알았지?"


그리고 서둘러서 내가 나가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창밖을 바라본다. 무언가 또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 거 같다. 나가기 전에 언니에게 무슨 일을 해서 이렇게 좋은 집에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언니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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