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10
은행에서 인턴 합격 연락을 받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인턴 업무로 투입이 되었다. 방학 시즌 짧은 기간 동안 진행하는 인턴이라 진행이 순식간이었다. 재학생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이벤트와도 같은 성격이라 실제로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주로 외부 홍보행사에 동원되거나 언론에 노출되면서 홍보용의 성격도 더러 있었다. 은행 업무에 실제 투입되기를 기대했던 몇몇 친구들은 빠르게 인턴을 그만두었고 그때마다 대기 번호를 받은 지원자들이 속속 들어왔다. 나도 처음에는 생각했던 인턴 업무와는 너무 달라서 당황했지만 그래도 은행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생각하는 진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할 거라 생각했고 어차피 짧은 기간이라 참고 인턴을 끝내기로 하였다.
인턴 과제 중에 대학교 캠퍼스에서 진행하는 이벤트 지원이 있어서 학교 캠퍼스 방문을 해야 했다. 방문하고 싶은 캠퍼스를 희망할 수 있었는데 마침 언니가 다니던 학교가 눈에 띄었다. 언니의 학교로 지원을 하였고 어렵지 않게 언니네 학교로 지원이 결정되었다.
"선주 잘 지내냐, 내일모레 서울에 일 있어서 올라갈 거야. 시간 될 때 연락해라."
아빠에게 연락이 왔는데 부담감 그 자체였다. 또 보면 언니 어딨 냐고 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강북 어딘가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나는 언니의 학교로 출근하였다.
언니의 입학식 이후로 4년 만에 방문이다. 입학식 당시 선용이는 단지 서울을 가니까 설레어하였고 나는 언니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나도 살던 동네에서 탈출해서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해 준 곳이다. 그리고 서울 속 놀랄 만큼 높았던 건물들과 수많은 인파를 보며 느꼈던 그 두근거림은 선용이가 느꼈던 그것과 동일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보았던 언니의 빈자리를 보며 다음에는 나의 차례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오기까지 큰 동기부여가 된 것도 사실이다.
언니가 입학했던 운동장은 그대로였다. 약간의 감성에 젖기가 무섭게 은행 직원과 인턴 동료들과 만나서 일을 해야 했고 교내에서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렇게 캠퍼스 내 차려진 부스에서 업무 지원을 하고 진행하는 이벤트와 관련해서 학교에 또 신고할 것이 있어서 학교 행정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 아빠가 와 있었다. 아빠와 나 둘 다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너도 언니 찾으러 온 거야?"
"아뇨. 전에 은행 인턴된 거 일 때문에 온 거예요. 언니 학교에서 진행하는 거예요."
"수연이 소식은 들은 거 없어?"
"전혀요."
아빠는 동네에서는 그렇게 거친 야성미를 뽐내던 아저씨였는데 학교에 들어와 있으니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맹수처럼 풀이 많이 죽은 거 같았다. 대학교 직원들 사이에서 허둥지둥 일처리를 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영락없는 촌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물론 나도 내 일처리를 하면서 역시나 한동안 헤매고 있었지만 말이다. 잠시 후 업무를 마치고 학교에서 퇴근하게 되어 언니가 입학식을 했던 본관 앞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빠를 보게 되었다. 아빠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풀 죽은 모습으로 있었다.
"쪽팔린다 진짜, 이제 사람들도 아는 거 같아, 수연이 걔는 뭐가 그리 꼬여서 몇 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이런 데서 이상한 물이 든 건지 진짜...."
대놓고 책임 전가하는 아빠의 말에 어이없어서 바로 말대꾸를 했다.
"그때 내가 언니 입장이었으면 나라도 질릴 거 같은데요? 아빠는 딸이 잘 있는지 보다 본인 체면이 더 중요한가 보죠?"
꽤 높은 강도로 말대꾸를 했음에도 아빠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살던 동네에서 아빠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온 집안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물론 캠퍼스에서조차 창고에서 하는 방식으로 했다간 금방 경찰이라도 찾아올 테지만, 아빠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말했다.
"선주야..... 그래 내가 미안하다. 내가 심했지. 근데 말이야 세상은 여유 부리면서 살만한 그런 게 아니야. 정말 가혹하다고, 나도 젊었을 때 무시도 많이 당하고 네 엄마에 너희들까지 정말 힘들었어. 정말 살기가 힘들다."
왠지 더 대들고 싶어졌다. 아빠의 삶이 힘들면 우리를 낳지나 말든지. 언니가 이런 상황에서 아빠의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더 쏘아붙이려고 하자 아빠가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수연이 이미 오래전에 자퇴했단다. 이거 받아."
내 무릎에 떨어진 두 개의 통장, 청약통장이었다. 명의를 보니까 언니와 내 이름이다. 예전에 묻지 말고 그냥 따라오라고 해서 갔던 지금 인턴을 하고 있는 이 은행에서 청약 통장을 만들어서 아빠가 계속 돈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너 이 은행 인턴 됐다고 해서 가져온 거야. 매달 얼마씩은 꼭 넣어놔. 사람은 있잖아 자기 발붙이고 살 곳이 있어야 돼, 네 언니 거는 나중에라도 보면 꼭 줘라. 갈게."
이 통장을 쳐다보던 새에 아빠는 일어나서 가버렸다. 멀리 보이는 아빠의 뒷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인다. 매일 우리를 말 안 듣고 밥값 못한다고 윽박지르던 성질 더러운 아저씨였는데 뒤로는 자식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통장에 돈을 넣고 있던 사람, 아니면 못내 우리를 당장 내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어떻게든 명분을 잡아서 내보내려 한 것일까? 멀리 가는 아빠를 쫓아가서 이렇게 조치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슨 말과 행동을 하면 좋을지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이다. 벤치 위에 덩그러니 남은 통장만 한참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