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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시 Feb 27. 2017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아픈 역사를 바라볼 용기가 없어서...',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고...',  '내 이야기는 아니라며...'

애써 외면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끌려갈 때 15살이었는데 돌아오니 22살이었다"는 김할머니의 피 맺힌 절규는 덮을래야 덮을 수 없는 지금도 진행 중인 우리의 역사입니다.



서울시는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와 공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0명의 증언과 사료를 토대로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발행하고, 그 기록물의 의미를 많은 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김소란, 김순악, 박영심, 문옥주, 배봉기, 김복동, 김옥주, 송신도, 박옥련, 하상숙. 80여 년 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죽음보다 아픈 세월을 모질게 견뎌내야 했던 여성들입니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의 일부입니다.





끌려갈 때 15살이었는데돌아오니 22



지난 2월 22일 오후 2시,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는 위안부 기록물의 의미를 시민들과 나누는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은 복도까지 시민들로 북적였습니다. 입구에는 ‘위안부’ 역사를 정리한 자료들이 늘어섰으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쪽지 공간도 마련되었습니다. 





이날 강연회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1) 할머니께서 참석해 주셨으며, 김 할머니는 대회의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한 맺힌 일생을 털어놓았습니다.


“15살에 끌려갔습니다. ‘공장이라는데 뭐 죽기야 하겠나’ 하고서 간 곳은 공장이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하는 공장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부대가 옮길 때마다 따라가다가 싱가포르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풀려나긴 했는데,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어디로 가나요. … 근근이 목숨만 살아서 돌아오니 나이도 몇이나 먹었는지 몰랐는데, 집에 오니 제가 22살이라 하더라고요.



김 할머니는 아직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 수습에 미온적인 한국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던졌습니다. 

“암흑 속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가 1억 원 받으려고 그런 고생을 했겠습니까. 돈이 문제입니까. 일본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합니다. 돈벌이로 갔다, 민간인이 한 일이다, 그런 식이에요.



김 할머니의 피맺힌 절규는 이어졌습니다. 

“합의할 때는 마땅히 우리들한테 물어야 안 되겠습니까? 한 마디도 없더니, 전화로 해결 지었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소녀상도 철거하고, ‘위안부’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고 해서 펄쩍 뛰었거든요. 절대 할 수 없다. 돈 받을 수가 없다.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을 줘도 우리는 받을 수가 없다. 취소하라고 1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있어요.” 



김 할머니의 연설에 청중들은 숙연해졌고 일부는 훌쩍였습니다.





당일 행사장에서는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강성현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강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끄집어냈습니다. 



“전시에 여성을 동원한 역사는 그냥 과거가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현재화된 과거사입니다. 할머니들이 아직 살아 계십니다. 피해 여성인 할머니들이 주체가 되는 과정이 있었고, 우리 앞에 서기까지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50년 넘게 할머니들이 침묵을 강요받던 한국사회의 역사가 겹쳐지는 것이고요.”




중국부터 미얀마까지전 세계로 끌려간 위안부





명백한 사실이지만 ‘위안부’ 역사는 오늘도 전혀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강 교수의 문제 제기입니다. 

“1975년 배봉기 할머니, 82년 이남님 할머니, 84년 노수복 할머니, 84년 배옥수 할머니 등 91년 김학순 할머니 전에도 ‘위안부’ 증언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 반응은 어땠나요?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알라’며 폭언을 쏟아냈습니다.” 



강 교수는 한국 정부가 단 한 번의 ‘위안부’ 실태조사도 없이 신고주의를 고집하며 자발적인 신고만을 받아온 점도 큰 문제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죠.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을 ‘시작’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강 교수의 바람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아픈 역사는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느새 잊혀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응원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위안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기록하고 온전하게 남기는 것입니다.



이번 3.1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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