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하차 끝낸 버스, 문 닫고 출발하면 '정차 통과'
과거 버스는 난폭 운전의 대명사였습니다. 버스 중앙 차로는 고사하고 정류장도 별로 없었고, 버스도 부족해 배차 간격이 길었던 시절에는 추운 겨울날 버스 한 대 놓치면 꽤 오랜 시간 정류장에서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버스도 교통 체증이 심한 시간에는 편도 4차로에서 1차로로 달리다 갑자기 핸들을 틀어 버스 정류장이 있는 4차로까지 횡단하며 뒤차들의 원성을 들어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버스가 많아지고, 배차 간격도 촘촘합니다. 버스 중앙 차로는 일반 차들과 별개로 운영되며, 지하철만큼이나 도착시각이 정확해졌습니다. 대도시에서 도심으로 진입할 때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아도 버스로 충분히 원하는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바로 버스의 정시성이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일반 승객들이 바라보는 버스의 이미지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20~30년 전 버스 운행을 했던 버스 기사들이 아직 그 습관 그대로 운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아직도 배차 시간에 쫓기는 버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저상버스의 질주
2004년 서울시 시내버스가 재편되면서 저상버스가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통 약자들 즉, 노인, 어린이, 임산부, 장애인, 환자 등 다양한 승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버스의 계단을 없앤 획기적인 버스가 출시된 것이죠.
기어가 오토매틱이라 출발할 때의 흔들림과 진동이 없어 버스 내 전도 사고율이 확연히 줄어들었고, 버스 기사는 운행이 즐거울 정도로 편리해졌죠. 저상 오토매틱 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들은 다시 수동 기어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매우 편안한 운전 환경 때문에 업무 피로도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전기버스, 천연 수소 버스 등 다양한 친환경 버스가 점차 버스 시장을 점유해 나가는데요. 모두
오토매틱(자동 기어) 버스들입니다.
일반 승객들도 저상버스를 선호합니다. 서울시는 2025년까지 서울시의 모든 시내버스를 저상버스로 교체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서울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모든 승객은 쾌적한 환경의 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셈인데요.
이러한 저상버스가 온종일 편안하게 운행되면 좋겠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출발 시 움직임이 수동 기어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릅니다. 수동 기어가 없어 액셀러레이터만 밟으면 차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기 때문에 급출발의 원인이 되는 것이죠. 이런 운행에도 테너지(연료 절감 장치)는 대부분 95점 이상을 유지하니 형평성에서 수동 기어 버스 배차를 받은 기사들의 불만이 나오기도 합니다.
일반 승객들도 급하게 움직이는 저상버스의 난폭 운전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잘 나가는’ 버스 때문에 오히려 불안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죠.
순간 가속력이 좋아 금세 고속으로 진입하여 주행하기 때문에 뒤차와의 간격이 벌어지는 것도 부지기수입니다.(수동 기어 버스 앞뒤로 저상버스가 배차되면 수동 기어 버스 기사는 죽을 맛)
확실히 과거보다 버스의 평균 속도가 느려진 것은 사실입니다. 배차 간격이 좁아지면 거북이 운행도 다반사죠.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도로 제한 속도는 시속 50km(이면 도로 30km)입니다. 시내버스의 평균 속도는 24km입니다.
승객이나 버스 기사 모두에게 만족감을 안겨주는 저상버스. 신체 장애인이나 다리 아픈 노인들은 일반 버스를 보내고 저상버스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계단이 그들에게는 큰 벽처럼 느껴지니까요.
▶신호등 까기
시내버스 기사들에게 신호등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배차 간격을 맞춰주는 시계기도 하지만, 배차 간격을 늘어뜨리는 엿가락 같기도 합니다.
모든 버스가 신호등에 맞춰 운행하면 배차 간격은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신호등은 모든 버스에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어떤 버스는 3분짜리 신호등을 가볍게 지나가고, 어떤 버스는 2~3분짜리 신호등 2~3개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갑니다.
어떤 회사의 선임들은 후임이 입사해 수습 때 신호등 까는 방법부터 알려주기도 합니다. 복잡한 구간이 아닌 다소 한산한 구간에서 신호등을 까게 되면 나의 휴식 시간은 그만큼 늘어나게 되고, 앞차와의 간격 조절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런 지점을 미리 공지해 주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운행의 중요한 팁이라 신입 기사들은 다른 구간은 제쳐두고 그 구간을 정확히 외워둡니다.
신호등을 까기 위해서 과속은 기본입니다. 과속은 만병의 근원이자 사고의 원인이죠. 대형 사고 대부분은 신호등 위반 때문에 벌어집니다. 12대 중과실에도 속해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 어려운 걸 해내는(?) 버스 기사들이 제법 많습니다.
노선이 편안해 신호등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넉넉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는 노선은 필요 없는 얘기지만, 그렇지 않은 회사가 훨씬 많아 신호등을 까보지 않은 기사는 아마 없을 듯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난폭 운전이라 할 만한, 버스의 과격한 주행이 시작됩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신호등에 걸려 정차해 있는 승용차 운전자들도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바로 신호등을 까기 위해 내달리는 버스들 때문입니다.
해당 노선에 있는 신호등의 시간과 체계 외우기는 버스 기사의 첫 번째 숙지 사항일 정도입니다. 신호등 체계를 빨리 익혀야 제시간에 차고지에 돌아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이러한 행태의 원인은 근로 시간과 휴식 시간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정차 통과
서울시 시내버스 단말기에는 정류장을 시속 20km 이하로 서행하지 않거나 정차하지 않으면 ‘무정차 통과’ 경고등이 뜹니다. 모든 정류장, 모든 버스의 공통 적용 사항입니다. 승객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울시 시내버스 기사라면 무조건 지켜야 할 항목입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울시 통제실로부터 해당 회사와 버스 기사는 징계를 받기도 합니다.
경기도 시내버스는 다릅니다. 단말기에 그런 센서도 없거니와, 승객 없는 정류장을 시속 50km로 통과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서울시 버스 중앙 차로에서 서울 시내버스를 앞에 두고 경기도 시내버스가 뒤를 따르게 되면 여지없이 추월해 나갑니다. 정류장에서 서행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승객이 정류장에 대기하고 있을 때입니다. 서울 시내버스가 진입할 때 손을 흔들어 자신이 탈 버스임을 미리 해당 버스 기사에게 알려주면 최고지만,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채 시속 20km 이하로 지나가는 버스를 쳐다보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채고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승객이 문제입니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버스가 절반 이상 통과했는데 뒤늦게 뛰어오는 승객도 많습니다.
그 승객의 민원으로 징계위에 회부된 버스 기사는 그 승객을 사이드 미러로 보지 못하여 정차하지 못했다고 진술할 것이고, 그 승객은 내가 분명히 손을 흔들었다고 진술할 것입니다.
결론은 어떨까요?
버스 기사는 과태료 10만 원 처분을 받습니다. 버스가 지나가도록 휴대폰을 보던 승객이 뒤따라오는지 확인까지 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 시속 20km는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입니다.
20km라 해도 대다수 버스는 10km로 통과할 때가 많으므로 빠른 속도라 할 수 없습니다.(단, 승객 승하차 완료하고 출발 후 미승차 승객이 적극적 승차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무정차 통과로 신고해도 기사에게 과태료 처분 안 됨)
버스 기사는 억울합니다. 이런 승객들의 민원이 원망스럽죠. 그러나 승객은 자신이 승차할 버스의 정차를 요구하는데 뭐가 억울하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아무리 모범 버스 기사라도 몇 번의 무정차 통과 경험은 있을 만큼 빈번히 발생합니다.
그만큼 승객과의 괴리가 가장 큰 부분이
‘무정차 통과’에 대한 상호 간 입장입니다.
버스가 자신을 무시해 통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버스 기사는 수많은 승객의 눈빛을 읽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정류장을 통과하기 때문에 승객들의 가벼운 수신호 하나가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늦은 오후 버스 정류장에 승객 1명이 서 있습니다. 그는 휴대폰을 보고 있으며, 어떤 버스가 오는지 별로 관심 없는 듯 보입니다. 신호등에 걸렸던 시내버스 7대가 노선별로 줄줄이 진입합니다. 승객이 1명도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정류장을 구렁이 담 넣어가듯 기차처럼 들어왔다가 승객의 ‘눈짓이나 몸짓’이 없기에 다시 빠져나갑니다.
승객의 센스가 참 아쉽습니다. 자신이 타지 않을 버스에게 손으로 가위표를 그리거나 엑스를 표시해주면 이런 번거로움은 상당히 줄일 수 있을 텐데요. 기사 관점에서 이런 센스 있는 승객은 대단히 환영받을 만합니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26조 제1항 제6호를 보면, ‘여객이 승·하차하기 전에 자동차를 출발시키거나 승·하차할 여객이 있는데도 정차하지 아니하고 정류소를 지나치는 행위’로 무정차 통과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과태료는 10만 원에 처하며(하루 일당 날아감), 버스가 정류장 뒷부분에 정차하여 승객이 승하차한 후 앞으로 진행하지 않고 옆 차선으로 바로 이동하는 것도 무정차 통과 사례로 꼽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버스 회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뒤늦게 뛰어온 승객을 승차시키다가 우측에 돌진하는 오토바이나 자전거(버스가 계속 진행하는 줄 알았겠지만)에 의해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은 버스 기사에게 있다고 합니다.
버스 정류장에 승객이 손짓하며 승차를 요구하는데도 무정차 하는 버스는 아마 없을 겁니다. 버스가 문을 여닫은 후 출발할 때까지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손짓하거나, 줄줄이 진입하는 버스를 쳐다보지도 않다가 뒤늦게 통과하는 버스에 손짓하면 버스는 급정거라도 해서 태워야 할까요?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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