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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찬 Apr 05. 2022

버스 기사 생활 중 아름다운 에피소드 하나.

앞뒤문 열고 30초 이상 기다렸던 것 같다.

버스 기사 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왜 없겠는가.




'버스'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가히 긍정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최근 버스 기사의 연봉과 전기 버스의 도입, 체계적인 준공영제 버스 지원 시스템으로 인해 많이 개선된 것도 있으나, 별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도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있으니 오늘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내가 생각해도 좀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에피소드.

아! 물론 나의 이야기다.



...



버스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 늦은 밤 경기도 모처의 버스 정류장.

서울이야 가로등과 온갖 네온사인으로 말그대로 새카만 정류장이 그리 많지 않다. 아파트와 빌딩들에서 쏟아내는 조명이 밤과 낮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인 곳도 많다. 서울시의 '베이형 정류장'은 의자에 온돌시스템까지 갖춰져 있으니 그야말로 선진국보다 더 좋은 시스템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경기도는 다르다. 논과 밭이 즐비하고 평야같은 곳도 많다.

그런 곳이 가로등이 있을 리 없고, 누군가는 그 정류장을 이용하기에 버스 기사로 임하면서 그런 정류장에서 승하차하는 승객들을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었다.


늦은 밤 가로등 하나 없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세우려면 자신의 휴대폰 불빛을 기사에게 쏴서 세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늦은 여름 밤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밤 11시~12시 사이 막탕(마지막 회전)을 돌기에 바쁜 와중에 위에 언급했던 그런 '평야', 즉 가로등도 없는 허허벌판에 여학생 한 명이 내렸다. 여고생쯤으로 보였다.


정말 아무런 불빛이 없어 노후화된 버스 라이트조차도 매우 밝게 느껴진 그런 곳이었다. 순간 드는 생각이, 그 여학생의 뒷모습과 연일 사건 기사로 도배되는 뉴스 화면이 오버랩됐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도 떠오르고.



난 앞뒤문을 모두 열고 30초 이상은 기다렸던 것 같다. 



어떤 남성이 함께 내리는 지, 혹은 그 여학생을 뒤따라 가는 사람은 없는지 지켜본 것이다. 버스 실내등이 생각보다 밝다. 문까지 열면 꽤 먼 곳까지 밝혀 줄 수 있다. 그리고 문 열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범죄 예방 효과가 뛰어날 것이란 개인적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한 일을 그 여학생이 알리 없지만, 그래도 그 때 내 행동은 두고두고 생각났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그랬던 것 같다. 버스 기사에게 30초는 매우 귀한 시간이지만, 사고가 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무 인적도 없고 집도 없는 것 같던 그 곳에서 내린 그 여학생은 얼마나 걸어갔을 지 모르겠지만,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문을 닫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농어촌버스 등 오지를 운행하는 버스 뒷문에 서치라이트 설치는 어떨까)



...



이 이야기는 사실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얼마전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다시듣기하면서 내가 버스기사와 승객의 부정적 인식 향상에 일조한 느낌이 있어, 떠오른 기억이다. 좋은 이야기도 많은데 말이지 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었는데 왜 하지 않았나라는 자책? ㅋㅋ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구구절절 버스 기사의 로망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 해 보련다.



작품명 : 술. 作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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