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이 중요하다는 데는 다들 동의하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경험한 세 가지 일화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왜 평생 어휘 공부가 필요한지
"조 의관(덕기의 조부)이 죽고, 덕기가 재산 상속자가 된다. 조 의관의 유산 목록에 정미소가 없었다는 것을 안 상훈은 정미소를 차지하려고 한다."
고3 모의평가에 출제된, 염상섭의 『삼대』 중간 줄거리입니다. 조부가 아들 상훈을 건너뛰고 손자인 덕기에게 재산을 물려줬는데, 정미소를 두고 아들과 아버지가 다투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요즘 학생들이 이 글에서 어떤 단어를 모를 것 같으세요? ‘조부’요? 네, 요즘 ‘조부’가 할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는 학생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삼수생과 이야기하다가 충격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학생은 ‘정미소’를 여자 이름으로 이해했던 겁니다! 윗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첩인 정미소가 얼마나 예뻤으면,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차지하려고 한 걸까? 어쨌든 이 소설은 아들, 아버지, 정미소 이 셋의 삼각관계가 중요할 테니 이를 중심으로 읽어나가자!“
황당하게 느껴지시나요? 이게 요즘 학생들 실태입니다. 특히 도시에서만 산 학생들은 정미소, 즉 방앗간을 본 적이 거의 없고, 주변에 ‘미소’라는 이름의 친구들도 있을 테니 이런 착각을 할 만합니다. 삐삐나 카세트테이프를 잘 모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시험에는 학생들이 태어나기 전 상황을 배경으로 한 지문도 곧잘 출제됩니다.
“제가 뭘 하겠다고만 하면 사람들이 너무 반대급부가 심해요. 이렇게 반대급부가 심하니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모 기관의 장이 대중 앞에서 했던 발언 중 일부입니다. 뭐가 어색한지 바로 보이시나요? 바로 ‘반대급부’입니다. 그냥 ‘반대가 심하다’라고 말하면 되는데, 괜히 유식한 척 문자를 쓰려다가 헛다리를 짚었습니다. ‘반대’와 모양이 비슷한 ‘반대급부’는 반대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반대급부’란 어떤 일에 대응하는 이익을 뜻합니다. 말이 좀 어렵죠? 쉽게 ‘대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한 달간 열심히 일하면 월급을 받죠? 이 월급이 노동에 대한 반대급부(대가)입니다.
어려운 전문용어 같지만, 수능 시험에 각주도 없이 툭 튀어나오는 단어입니다. 실제 기출문장을 살펴보죠.
“물질적 반대 급부를 기대하고 예술가를 돕는 후원자가 보기에는, 예술가의 재능은 하나의 경제적 가치를 가진 대상일 뿐이다.” 앞서 반대급부의 뜻을 배웠으니, ‘후원자는 예술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고, 그에 대한 대가(반대 급부)로 예술품을 기대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죠?
#수요일
직원 : 목요일 3시에 뵙겠습니다.
거래처 사장 : 네.
#목요일
직원 : 확인연락 드립니다. 금일 3시에 뵙겠습니다.
거래처 사장 : 목요일에 보자고 했는데 갑자기 금요일이라뇨!
위 사례는 인터넷에 떠돌았던 유명한 유머(?)인데, 저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금일’은 금요일이 아니라 오늘을 뜻하는 한자어인데, 상대방이 이를 몰라서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한자어로 어제=작일, 오늘=금일, 내일=명일이라고 합니다. 언뜻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금일, 명일은 직장, 군대에서 흔히 쓰는 말입니다.
이런 단어는 수능 시험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 "내 또한 정씨 여자를 보고자 하나니 명일에 당당히 정씨 여자를 불러들여 보리라.”(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
● “신이 전일 죄상은 죽어 마땅하오나, 금일 일은 만만 애매하오니 용서하옵소서."(작자 미상, 「전우치전」)
● 작일에 존자 분부하시되, ‘명일 유시에 안평국 왕자 내게 올 것이니 오는 즉시 아뢰라.’(작자 미상, 「적성의전」)
그런데 학생들이 작일, 금일, 명일이 무슨 뜻인지 알까요? 당연히 잘 모릅니다. 오늘, 내일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뭐하러 이런 단어를 쓰나요. 친구들끼리도, 선생님들도 잘 안 씁니다. 그래서 문학작품 읽을 때도 명확한 뜻을 모르고, 그 상태로 사회인이 되는 거죠.
위 사례들에서 보듯, 어휘력은 비단 국어시험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학생 때는 문제를 틀리거나 선생님의 지적을 통해 배울 수라도 있는데, 사회에서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틀린 걸 지적하는 게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뒤에서 무시할 뿐이죠.) 결국 능동적으로 사전 찾아보며 점검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위 칼럼은 서울시교육청의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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