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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시교육청 Feb 07. 2020

교과서를 따라가는 여행: 다산 정약용과 수원화성 이야기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 거중기, 그리고 수원화성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인데요, 다들 한번쯤은 꼭 들어본 이름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오늘은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과 수원화성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조선의 실학자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1762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7세 때 ‘산’이라는 시를 쓸 정도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는데요,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1777년 정약용은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 실학에 뜻을 두었고, 유교 경전과 주자의 집주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28세 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접어들게 되었죠.

이 때 그가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했는데요, 이는 잘 알려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더 나아가 23세 때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 서양과학과 천주교 신앙에 눈뜨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천주교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강진의 유배기간 동안 다산은 5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썼으며 특히 경제학과 더불어 다산 사상의 주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57세 되던 해 가을 강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여 미완이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흠흠신서〉, 〈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습니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육체와 정신을 추스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었죠. 그리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정약용은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백성의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 발전된다는 인식을 확립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성리학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백성중심에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민본사상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이해하고,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했고, 서로 간의 책임과 의무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민본사상 민심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사상   


       

정약용은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였기 때문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 *을 펼쳤답니다. 특히 토지 제도를 개혁해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개혁론 개혁을 하자는 의견이나 주장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정약용과 당시 왕이었던 정조와의 관계입니다. 정조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정조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학자로서 그리고 관리로서 성장했답니다. 정조가 죽자 유배지에서 약 500여 권의 책을 썼을 정도였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돈독했다고 합니다.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할 때 중심역할을 했는데요, 정조는 미리부터 성 쌓기에 관련된 책들을 구해 정약용에게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또, 정약용은 그런 정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기술 서적과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책까지 모조리 연구하며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답니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 건축 기간을 앞당겼고, 배다리를 만들어 정조의 화성 행차를 돕기도 했습니다. 그럼, 수원화성에 대해 살펴볼까요?


정조가 축성한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습니다.     


*책봉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임금을 봉하여 세우는 것을 말함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졌습니다.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수원화성 축조기간 중 거중기를 발명했는데요, 건축 설계를 맡은 실학자 정약용이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했답니다. 화성 공사에는 정약용의 설계에 따라 왕실에서 직접 제작한 거중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로써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위 그림은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개최한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같은 주제의 병풍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에 각 1건, 동국대학교박물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박물관, 도쿄예술대학 등에 낱폭으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화성능행도병풍》 제3폭 <봉수당진찬도>는 다른 소장본들과 달리 화면의 좌우가 바뀌어 있는데 이는 후대에 모사하는 과정에서 화본(畵本)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조선 정치의 중심지 '수원화성'!

정조의 효심을 볼 수 있는 수원화성!

<출처 :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수원화성

주소 :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시간 : 09:00 ~ 18:00 연중무휴

입장료 어른 1,000원 / 청소년 및 군인 700원 / 어린이 500원



조선 최고의 실학자였던 정약용에 대해 알아본 후, 정약용과 정조의 합심이 더해진 수원화성까지 소개해드리는 시간을 가져보았는데요, 이렇게 보니 다산 정약용이 했던 공이 크다는 것이 한 번 더 느껴지네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바로 가기엔 사뭇 어려움이 있겠지만, 잠잠해졌을 때 야경도 예쁜 '수원화성'을 꼭 방문해보세요! :D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국립고궁박물관

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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