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나는 자주 그렇게 물었다.
엄마에게 일어난 일들은 언제나 불합리해 보였다.
사람들이 엄마를 무시하고,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장면이 너무 선명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어주고, 받아주고, 또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답답했지만, 동시에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중얼거렸다.
“대단해, 노귀자. 정말 대단해.”
시장에서도, 친척들 사이에서도, 동네에서도
사람들은 “너희 엄마 참 순해”라고 말했다.
나는 웃었지만, 그 말이 꼭 칭찬 같지는 않았다.
엄마의 순수함은 세상에겐 순응으로 보였고,
딸인 나에게는 늘 조금 인색했다.
엄마는 타인에게는 넉넉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무심했다.
그 무심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받지 못한 애정은 여전히 빈자리를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고 싶었다.
엄마가 주지 못한 사랑을,
엄마도 받지 못한 사랑을
내가 대신 채워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엄마는 알까.
요즘 나는 내 아이에게서 그 마음을 느낀다.
나만 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은 돌려받고 있었던 사랑이란 걸.
“나는 외로워. 나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어.”
그 말을 되뇌며 자책할 때면,
내 옆엔 작은 아이가 조용히 있었다.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어릴 적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쩌면 나는 ‘그때의 나’를 내 아이를 통해 위로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 아들, 너무 예뻐.”
나는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행복이 조용히 밀려온다.
나는 아이에게 잠들기 전, 늘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그럼 아이는 짧게 대답한다.
“응.”
그 한마디는 기꺼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린다. 귀엽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물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엄마를 사랑하는 거.”
나는 놀랐다.
“맞아. 그거야.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서 배웠어?”
“아니, 그냥 알았어.”
그 대답이 마음을 울렸다.
그래서 나는 되물었다.
“그럼, 엄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의 사랑은 너야. 엄마에게 사랑은, 바로 너.”
그건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내 삶의 정의였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였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존재 이유이자
엄마가 나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그날 밤도 그런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친정집의 주말밤,
아이와 나는 전보다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제는 함께 있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각자의 시간이 있고, 각자의 편의가 있다.
그래도 그날은 잠깐이라도 웃고 싶었다.
모두가 잠들기 전,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하려고.
하지만 아이는 유난히 고집을 부렸다.
지친 어른들은 아이의 텐션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나는 괜히 눈치를 보았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너, 내 딸한테 왜 그래.”
그 말이 어색했지만 싫지 않았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해줄 줄 몰랐다.
“엄마가 나를 편들다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는 나에게 직접적인 칭찬이나 다정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손길은 따뜻했다.
찐 고구마를 함께 먹던 겨울,
전국노래자랑을 보며 뜨개질을 가르쳐주던 오후,
내 머리를 손으로 하나하나 꼬아 ‘부메랑 펌’을 만들어주던 날들.
그런 세심함 속에서 자랐지만,
엄마의 눈빛에는 늘 ‘따뜻함’이 비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원했다.
지금은 내 아이에게 충분히 주고 있다고 믿지만,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결핍은
여전히 나의 갈망으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무심한 부모 아래서 자랐지만
내 아이에게는 무심한 엄마가 아니란 점이.
그래서 나는 가끔 묻는다.
“이건 나의 회복일까, 아니면 욕심일까.”
내 엄마, 노귀자.
그녀를 평생 탐구해왔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런 여자가, 이런 사람이 다 있구나.
그게 나의 결론이다.
노귀자를 설명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쓴다.
내 꿈은 여전히, 노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