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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서울 i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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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이 Apr 15. 2021

무서운 10대들이 되찾아 준 그 무언가

  한국어-덴마크어 언어교환을 하던 친구 M이 출산으로 계속하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자기 친구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는데 한국어 선생님을 찾고 있다며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줬다. 대상은 10대 아이들. 같이 저녁을 먹던 M의 남편이 한 마디 했다. ”10대? 쉽지 않겠는데?”. ’그러게’ 나는 맘속으로 ’요즘 10대’들을 그리며 덧붙였다. ”에이 아냐, 자기들이 배우고 싶어서 신청하는 건데 열심히 하는 애들 일거야. 페이도 꽤 괜찮을 거라고 들었어.” 내 마음속 걱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M은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일주일에 두 번이면 시간도 많이 안 잡아먹고 페이도 쎄다니 한번 해보자.


  첫 수업 날이 다가오자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코스웍을 들을 때 강의 마지막 날 교수님을 마주한 강의평가에서 직설적인 피드백을 거리낌 없이 하던 덴마크 학생들이 생각났다. 게다가 내가 가르칠 아이들은 무서울 것 없는 10대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 과외는 몇 번 해봤지만 그건 1대1이어서 괜찮았는데. 한국어는 언어교환 말고는 가르쳐본 적도 없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고민과 함께 준비한 수업 자료를 복습하다 보니 어느새 코펜하겐 밖 새로운 도시 <스틴루세Stenløse>에 도착했다. 역 앞에 작은 쇼핑센터만 덩그러니 있고 집들만 보이는 ’도시’보다는 ’마을’이란 말이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여기의 아이들은 코펜하겐의 아이들보다는 착하고 순수할 것 같아.’ 라는 어이없는 선입견으로 긴장한 마음을 조금 다스리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파라다이스 호텔이라는 프로 알아요? 거기서 어떤 여자가 딜도를 들고 어떤 남자를 쫓아가는데 진짜 충격적이라니깐요.”


  첫 수업을 마치고 시간이 남아 이야기를 하던 중에 학생 한 명이 한 말이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네가 충격이다.’ 속마음을 감춘 채 어색하게 웃으며 ”진짜?” 라고 대답했고 신이 난 아이들은 그 짧은 리액션에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저희는요, 진짜 착한 애들이에요. 저희 학교에는 막 스누즈(담배 대신 입 안에 넣는 니코틴백)하는 애들도 있어요. 그거 아무 데나 버리는데 진짜 토 나와요.”

    ”제 친구는 벌써 맥주 마셔요(덴마크는 만 16세부터 술을 마실 수 있다). 무슨 맛으로 그런 걸 먹는지. 요즘 애들은 진짜 문제라니까요.”

    ”덴마크가 진짜 바이킹이에요. 원래 노르웨이랑 스웨덴도 다 덴마크였어요.”

    ”나는 한국사람들은 다 성형 수술한 인조인간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을 보고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거침없이 뱉는 말들 속에 오히려 그 나이 때의 악의 없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자기 나라인 덴마크를 나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하고 자기들은 또래보다 착한 아이들이란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나만 너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구나.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얘네들은 진짜 착한 애들’이라는 탐색전이 끝난 후에도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덴마크어로 하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알아들으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수업 시간에 f*cking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아이를 제지를 해야 하는 것인지, 한국 같았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을 덴마크는 어떤 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취미로 배우는 한국어 선생님인데 쿨하지 않은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망설였다.


  임시 한국어 수업이 정규 수업으로 편성되어 두 번째 반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고민은 더 깊어졌다. 4명이었던 아이들은 14명이 되었다. 교실에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과외를 할 때는 당연히 내줬던 숙제나, 매주 치는 단어시험도 이 아이들에게는 의견을 물어보게 되었다. 실제로 덴마크는 8학년(중학교 2학년)까지는 시험이 없어서 시험을 쳐본 적이 없는 아이들도 많았다. 나는 한 수업을 15분 정도의 한국문화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한국어 가르치는 것으로 구성했는데 가끔은 ’내가 너무 국수주의자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도 했다.


  그 많던 고민들은 내가 그냥 내가 되었을 때 풀렸다. 그냥 단어를 외워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쪽지시험을 치고. 아직 어려운 아이들은 오픈북으로 시험을 치라고 하고 다 같이 답을 체크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덴마크어로 ”아니 왜 the moon이야? A moon이 아니라?”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수업 중에 다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마음을 열고 쉬는 시간에 자기들이 하는 이야기도 내게 영어로 해주거나 몇몇은 아예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도 영어로 하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걱정했던 일제강점기에 대한 프레젠테이션도 반응이 좋았다.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한국사람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반감을 이해하는 듯했다.


  가장 많은 정이 들었던 두 번째 반 아이들은 내가 작은 선물을 주면 그 다음주에 덴마크 과자라면서 나도 슈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선물로 주었다. 더 애정이 가는 게 당연했다. 수업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기념이 될 수 있는 상장을 프린트하고, 에그타르트와 파운드 케이크를 만들어갔다.  아이들은 돈을 모아 산 수제 초콜릿과 비밀스레 다 같이 쓴 편지를 내게 주었다. 집에 가는 길 내내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코펜하겐에서 석사를 하면서 수업 중에 그리고 프로젝트 중에 만났던 덴마크인 동기들(이라는 유대감 있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같은 학기에 함께 입학한 학생들)과 동료들(역시 이 말이 어울리는지 의문이지만)은 이런 이미지였다. 겉으로 보기엔 활발하고 먼저 다가올 때도 있지만 내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어 하면 분명한 선을 그어버리는. 거기에 상처를 많이 받은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비-덴마크인 친구들은 비-덴마크인끼리 다니고 덴마크 애들은 덴마크인끼리 다녔다(그렇다, 우리는 non-danish와 danish로 분류했다). 덴마크 사람들이 대다수인 연구소에서 졸업 논문 프로젝트를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는 투명인간인 것 마냥 덴마크어만 쓰는 점심시간이 너무 싫어서 연구소에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덴마크인들의 뚫을 수 없을 듯한 그 벽은 내게도 스스로 벽을 쌓게 만들었다. 더 이상 덴마크인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무서운 줄 알았던 10대 아이들이 준비한 초콜릿과 편지가 이렇게 쉽게 내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다니.

 

어쩌면 학생과 선생님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경험은 앞으로 내가 마음의 문을 닫으려고 할 때마다 경종을 울려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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