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겉핥기 보고서 1 - 한국의 젠더 문제에 답하다
브라질에 도착한 첫날, 내가 살고 있는 도시 깡삐나스(Campinas)는 시끌벅적했다. 마침 카니발 (Carnaval)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동성애자들. 게이, 레즈비언부터 치마와 브라탑을 입은 남성들까지.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깃발이 흩날린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24년 간 굳건히 이성애자로 살아온 내게 브라질의 첫인상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이성애자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나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다. 대쪽 같은 이성애자인 나는 동성애자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다. 생물학적 남성 14명이 함께 사는 우리 집에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공존한다. 옆방 친구 존(Jonh)은 게이다. 그의 남자친구 루이즈(Luiz)는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오며, 그들의 연애 1주년을 기념하는 파티도 집에서 열었다. 또 다른 방의 친구 페드로(Pedro)와 에히키(Erik)는 양성애자(Bisexual)다. 이들은 여성과 연애하기도, 남성과 키스하기도 한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여자 친구 마누엘라(Manuela)도 양성애자다. 남자와 연애를 하지만, 같은 여성과의 키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하이(Ray)는 남성이다. 수염을 기르지만 머리를 묶고, 미니스커트와 브라탑을 자주 입는다. 그의 성 정체성이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 않는다. 브라질에는 하이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을 틀에 넣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성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구조와 관습에서 기인하기에 특정한 틀에 자신을 맞추기 거부하는 것이다. 브라질 상위 1% 인재들이 모이는 이곳 깡삐나스 대학교(Unicamp)에는 이처럼 다양한 성 정체성이 공존한다. 어떠한 성소수자도 적어도 이곳 대학에서는 차별받지 않는다.
이곳 집에 들어오기 위해 일주일의 테스트 위크(Test Week)를 거쳤다. 앞으로 10명이 넘는 친구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어쩌면 당연한 절차이다. 테스트 위크의 3일 차였을 거다. 엔히키(Henrique)라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섣불리 대답하려다 큰 실수를 할 뻔했다. 나는 대한민국 평균의 20대 군필 남성이다. 성소수자가 큰 문제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20년 이상을 살았고, 군대라는 조직에 있었기에 게이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군대라는 남초 조직과 게이는 공존하기 어려운 개념이고, 대부분의 친구가 군필이기에 당연히 게이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질 수 없다. 그래서 늘 한국에서 답하듯, "나는 게이를 존나 혐오해"라고 섣불리 뱉을 뻔했다. 다행히 순간 '아차!' 싶어 "나는 게이를 좋아하지 않아, 나는 이성애자거든. 하지만 나는 그들은 존중해"라는 모범적인 답을 했다.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우리 집에 성소수자 친구들이 살아"라는 것이었다. 비단 우리 집뿐만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공동 거주하는 헤뿌블리카(Republica)라는 집들은 대부분 'LGBT 환영'을 표어로 건다. 만약 내가 혐오 섞인 발언을 하였다면 나는 이곳 대학가에서 집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나는 성소수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모든 성 정체성을 존중한다. 그동안 섣불리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비난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나는 나의 친구들을 그들의 성 정체성으로 구분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성 정체성 이전에 모두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사람'이다. 자신의 양심과 도덕 규칙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며, 일과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즐길 때는 '다 함께' 즐길 줄 아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단지 그들의 성 정체성을 이유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친구들 편에 설 것이다. 단지 피부색이 다른 것처럼, 성 정체성이 다를 뿐이다. 피부색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성 정체성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봐왔던 인종과 민족에 대한 차별, 혐오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친구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모든 성소수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이미 2011년 10월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여전히 동성결혼 및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가 민감한 이슈인 한국에 비하면 엄청난 진보이다. 휴일이면 상파울루(São Paulo) 시의 광장에서는 종종 퀴어 축제나 게이 퍼레이드가 개최된다. 그날, 5월 30일은 공휴일이었다. 내 동네 깡삐나스에서 버스를 타고 상파울루 시 바하풍다(Barra Funda)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바로 옆 라틴 아메리카 기념관(Memorial da América Latina) 광장에서 퀴어 축제가 열려 수많은 인파가 광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수많은 인파 속에는 동성 커플을 비롯한 다양한 성소수자가 줄을 이뤘다. 나는 친구와 함께 브라질 축구 박물관으로 향했다. 공휴일이라 박물관은 닫혀 있었다. 화장실만 이용하고 나가려는 찰나 충격적인 안내문을 발견한다. "다양성을 존중하세요. 축구 박물관에서 당신은 당신의 성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상파울루 시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곳 축구 박물관에 이러한 문구가 적혀있다니.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 나는 한국에서 이러한 글귀를 읽어본 적이 없다. 물론 브라질에서도 흔치 않은 안내문이나,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브라질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다.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대체로 브라질 사회에서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잔존한다. 어느 날 친구 존에게 물었다. "부모님이, 네가 루이즈랑 만나는 거 아셔?" 존은 루이즈와 연애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에게 연애 사실을, 그리고 상대가 동성이라는 것을 밝혔다. 부모님은 당연히 크게 노하였고 충격을 먹었다. 존에게는 누나가 있는데, 이미 누나 역시 동성애 사실을 부모님에게 밝혔고 큰 갈등으로 번졌던 가족사가 있다. 둘째인 존마저 동성애자라니,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기성세대가 가진 동성애에 대한 편견 또한 작용했으리라. 그렇게 존의 집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눈물이 흘렀으며 긴 정적이 흘렀다. 존의 부모님은 누나의 앞선 커밍아웃으로 조금은 익숙했고, 어쩔 수 없기에 받아들였다. 존은 루이즈를 집에 초대해 부모님에게 소개하였고 마찬가지로 루이즈 역시 존을 집에 초대했다. 양 가 부모님은 둘의 관계를 인정하였고 여전히 둘은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이 사건은 여전히 잔존하는 브라질 내 성 소수자의 위치를 보여준다. 길거리에 동성애자 커플이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이 사회에 완벽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대학가의 많은 젊은이들은 성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권리를 지지하지만, 그렇지 않은 윗세대와 다른 사회 계층은 여전히 설득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는 브라질이 많이 나아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편적인 일화이지만, 존과 부모님 사이의 갈등은 부모님이 존의 동성애를 인정함으로써 봉합되었다. 브라질의 성소수자들은 목소리를 내며 타자를 설득하고 있고, 비(非) 성소수자 역시 조금씩 그들의 편견을 깨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지난해, 큰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 있다. 대구시 공무원과 경찰의 '퀴어 축제'를 둘러싼 갈등이다. 그 중심에는 홍준표 대구 시장이 있었다. 홍준표 대구 시장은 '퀴어문화축제가 도로를 불법으로 점거한다'며 반대하였으나, 경찰 측은 '적법하게 신고된 집회'라며 옹호하였다. 위 사건은 집회에 관한 법리적 해석 문제로 초점이 맞춰졌으나, 동시에 하필이면 '퀴어문화축제'를 둘러싼 문제라는 점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2024년 올해에도 마찬가지로 대구에서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될 예정인데 이와 관련한 우려가 나타나고 있다.
사실 성소수자와 관련된 국내 논란이 이뿐만이 아니다.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한 후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게이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은 길에 나오지 않는다. 일부 극단적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박멸'이라는 표어를 광장에 걸고, 정치권에서 역시 성소수자 문제가 나올 때마다 목소리를 낮춘다. 비단 극단적 신자뿐만이 아니다. 브라질에 함께 온 한국 교환학생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에서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친구는 동성애 문제는 교리와 충돌하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섣불리 종교를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대화가 필요한 성소수자에 대한 이슈가 한국에서는 제자리걸음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한다. 해외에 잠깐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한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힌다. 경제력이 달라도 같은 지하철에 타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 한국과 브라질의 1인당 경제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도 한국의 치안은 훌륭하고, 모든 시설이 브라질보다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인식은 보수적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다. 틀린 것이기에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사고(思考)가 갇힌 사회는 썩기 마련이다. 브라질이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는 아니지만, '다 함께 사는' 나라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브라질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한국 또한 브라질로부터 조금씩 배우길 희망한다. 어느 나라든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