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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부 Aug 26. 2020

알싸하고 꼬릿한 월세 살이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2-1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 오성부

나는 서울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수입도 생겼지만 나는 여전히 월세에 살고 있다. 월세에서 월세로 이어갔지만 그 월세에도 나름의(?) 발전이 있다.   


1. 첫 번째 월세     

처음에 올라왔을 때는 보증금 삼백에 월세 50만 원짜리 방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고시텔이었는데, 1~2평 남짓한 공간에 샤워실과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나는 이 작은 방에서 친구와 함께 살았는데 성인 남자가 누우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정말 딱 맞춤형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3개월 남짓 살았을 때쯤. 이사를 해야 했다. 친구에게 사정이 생겨 더는 같이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혼자서 보증금에 월세까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사는 게 벅찼기 때문이었다.           

2. 두 번째 월세     

나는 다른 룸메이트는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고향 친구인 태수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태수가 살고 있는 집의 월세 20만 원을 부담하기로 하고 같이 살기로 했다. 태수네 집은 전에 살던 고시텔보다는 아무래도 좋았다. 


원룸이었는데 방 한 칸에 화장실이 있고 조그마한 싱크대가 하나 딸린 집이었다. 나는 태수와 함께 긴 동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친구와 툭하면 싸우는 게 일이었다. 좁은 집에서 매일 지지고 볶기를 매일. 그러다 심하게 싸운 어느 날. 나는 태수네 집에서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우울하고 쓸쓸하고 서럽기도 하고. 얼마나 속에서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끅끅 울음이 절로 삼켜졌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 보니 내 앞에 어느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높이 우뚝 솟은 아파트는 집집마다 불이 켜져 이어 반짝반짝했다. 이렇게 많은 집들이 있는데. 지금 이 거리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다 돌아갈 집이 있겠지. 하루의 고단함을 덜어내 줄 안락한 공간이 있겠지. 모두들 나만 빼고, 저 사람들은 다 돌아갈 집이 있겠지...


내 집 한 칸 없는 게 이렇게나 서럽고 아플 줄이야.      


3. 세 번째 월세     

당장 갈 곳을 잃은 나는 친한 동생의 집에 일주일 정도 신세를 지며(친한 동생은 명철이다) 방을 알아보다가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가 40만 원인 어느 상가주택이 나온 것을 보고 곧바로 계약을 하고 들어갔다. 방 3개의 집을 한 개로 나누어서 쓰는 구조였는데 이 집에서 나는 2년 정도 살았다. 


처음에는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혼자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격했고 온전히 나만의 집이 있다는 사실이 매일 밤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음이 잘 되지 않는 통에 옆집 강아지가 짖는 소리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게다가 여름에는 창문이 바깥으로 연결되는 곳이 없다 보니 그 더위를 온전히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다. 어떤 날은 집이 있는 데도 사우나에서 자거나 새벽 거리를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냥 좋았다. 첫 지상으로의 월세 집이 생겼다는 것에. 그런 내 집이 있다는 것에. 내가 새벽 거리를 걷다가도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4. 네 번째 월세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일하던 곳에서 주는 70만 원의 월급으로는 월세에, 물세에, 전기세에... 공과금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간 꾸역꾸역 버텨왔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래서 아는 지인 분에게 사정을 말을 했더니 새마을 주택 반 지하 집을 소개해주셨다. 


그 집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가 25만 원인 집이었는데 방이 두 개인 공간에 화장실도 있고 싱크대도 제법 넓어서 지난 집보다는 꽤 좋아 보였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건 월세가 반으로 줄어드니 생활에 훨씬 숨통이 트인다는 것이었다. 단 돈 1만 원이라도 줄어드니 밥 한 끼를 더 먹을 수 있었고 여름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한 개라도 더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집인 듯~ 내 집 아닌~ 내 집 같은” 집에는 문제가 늘 공존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 집은 신발장이 집 밖에 있어서 신발을 밖에 보관하는데 그러다 보니 신발을 자주 도둑을 맞았다. 당시 정말 큰마음을 먹고 산, 나이키 운동화를 4일 만에 도둑을 맞은 것이다. 그 운동화를 한 번 신을 때면 아까운 마음이 들어 신기 전에 몇 번이고 신을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걸을 때도 늘 조심조심하며 신었었는데. 그날은 정말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은 자고 있는데 “찍찍”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순간 눈이 번뜩 떠져서 귀를 기울여보니 화장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연 순간. 나는 정말 너무나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큰 쥐 한 마리가 온 화장실을 휘젓고 다니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디에서 들어온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집주인 말에 의하면 쥐들이 먹잇감을 찾으려고 변기를 들락날락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기암을 토할 노릇이었지만, 그때부터 쥐 소탕작전을 펼쳤다. 어찌나 날 샌 놈인지 잡으려고 할 때마다 변기 속으로 도망가는 통에 속이 터졌다. 그래서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쥐 잡는 진득이를 사서 화장실과 싱크대까지 설치를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싱크대 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 보니 쥐가 진득이에 딱 붙어 있었다. 쥐를 잡긴 잡았는데 도대체 이 쥐를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까지 기다려 나는 옆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할머니는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고무장갑을 끼고 와서는 진득이에 붙은 쥐를 처리해주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말 한마디.     


“총각,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지 그래?”     

그 후로 우리 집에는 쥐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들 외에도 이 월세 집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장마철이면 집 온갖 곳에 곰팡이 꽃이 피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느 날은 비가 온 집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와 침실까지 못 쓰게 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어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에 더 좋은 ‘월세 집’을 구했다.          


5.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월세에 산다. 내가 언제쯤 이 월세에서 벗어나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서울 생활을 한지가 얼마인데 아직까지 월세에서 못 벗어났느냐고 할 수도, 결혼까지 했는데 그 아내는 무슨 고생이냐며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또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살아서 형편이 나아지는 만큼 서울의 환경도 자꾸자꾸 변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집을 알아보면 집값은 천정부지 솟구쳐 있고. 돈을 조금 더 모아서 또 집을 알아보면 내가 모은 돈, 꼭 그만큼의 금액이 올라 있었다. 그래서 정말 어떤 날을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랬던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른 장면 장면이 있었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살았던 곳. 그리고 태수와 살았던 공간. 처음 혼자 살게 되었던 상가 주택. 쥐가 나오고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막느라 온갖 고군분투를 하며 지냈던 그 집.


1평짜리 고시텔에서 반 지하, 반 지하에서 다시 지상으로. 나의 서울살이는 겉으로 보기에 확 달라지거나 무언가 대단한 변화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느리지만 반걸음씩, 꼭 그만큼씩 나아지고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혼자 이야기한다.


아, 서울!! 그래도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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