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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부 Aug 26. 2020

분홍 소시지가 가난의 상징이라고?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2-3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 오성부

나는 3대째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히 개척교회를 일궈나가는 집안이다 보니 가난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어본 적도, 새 옷을 입어본 적도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서러운 기억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분홍 소시지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부러웠던 건 내 짝꿍이었다. 그 친구의 도시락 반찬에는 냄새도 좋고 맛도 좋은 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나의 도시락 반찬엔 언제나 콩이나 나물류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늘 점심시간만 되면 도시락을 내어놓기가 싫을 정도였으니까. 


그날도 짝꿍의 햄 반찬을 힐끔힐끔 쳐다만 보다 도시락 뚜껑을 닫아버린 채 점심을 굶고 집으로 돌아왔다. 밥과 반찬이 그대로인 도시락을 보며 어머니가 물으셨다.     


“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왜 도시락이 그대로야?”     

어머니의 말에 뾰로통한 얼굴로 불쑥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도 햄이 먹고 싶어요... 햄 반찬 좀 싸주시면 안 돼요?”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반찬투정에 침통한 얼굴이 되어 아무 말 없이 돌아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어나 학교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무언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흘깃 쳐다보니 어머니가 내 도시락 반찬을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어제 철없이 햄 반찬 타령을 했던 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그런 나 자신이 참 못났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저런 불편한 마음으로 도시락 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딸랑딸랑 손끝에  걸린 도시락 가방을 보며 나는 굳게 다짐했다. ‘오늘은 그 녀석의 햄 반찬에 굴하지 말고 꼭 이 도시락 다 먹어야지. 매일 아침 엄마가 이렇게 정성껏 싸주시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산뜻해졌다.


점심시간. 오늘도 변함없이 짝꿍의 도시락 한 편에 자리 잡은 햄 반찬이 보였다. 오밀조밀. 참 맛나게도 보였다. 그 순간,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짝꿍을 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안선철. 오늘 밥 같이 먹자.”     

밥을 같이 먹자니. 이런 뜬금없는 소리가. 아침의 다짐이 참 무색하기도 하지. 나도 참 어지간히 그놈의 햄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밥을 같이 먹자는 나의 말에 선철이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래? 좋아. 근데, 너 반찬 좀 보자.”     


반찬을 보자는 말에 나는 순간 머쓱해졌지만 아침에 다짐한 대로 기죽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반찬 뚜껑을 열어 보이니 그 속엔 핑크색이 감도는 분홍색 소시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소시지에 그만 울컥했다. 햄이 먹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쌈짓돈을 털어 그 소시지를 샀으리라. 한참 분홍 소시지를 보며 감격에 젖어있는데 선철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뭐야, 이거 켄터키가 아니잖아. 분홍 소시지네? 이거 되게 맛없는데... 그냥 나 혼자 먹을래.”     

너무 속상했다. 거절당했다는 것보다, 조금 전 어머니의 정성 어린 도시락에 대한 마음은 다 사라지고 선철이의 말에 순간, ‘왜 나는 켄터키 소시지를 먹을 수가 없는 거지?’라는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햄한테 내 마음이 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 통쾌한 사건이 있었다. 가을 운동회가 끝났을 무렵이었는데 그날은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로 큰 찬수라는 친구가 자신이 오늘 고기반찬을 두둑하게 싸왔으니 반 친구들끼리 모여서 도시락을 먹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런데 나는 거기 끼어 도시락을 내어놓기가 망설여졌다. 며칠 전 선철이에게 내 반찬을 보였다가 망신만 당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시무룩해져 있는 내 옆으로 찬수가 와서 어깨를 툭 치며,     

“성부! 밥 같이 먹을 거지? 빨리 껴 인마. 지금 안 끼면 다른 놈들이 죄다 먹어치워서 없다.” 

“어? 어... 응 그래... 찬수야 근데 내 반찬이...”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며 찬수에게 내 도시락 반찬의 상태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야, 뭘 그런 걸 따져? 고기반찬에는 뭐? 다른 거 필요 없다. 김치만 있어도 금상첨화지! 참 별 걱정을 다하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와라!”      


나는 찬수의 말에 활짝 웃으며 무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철이도 거들었다.     


“야 찬수! 나도 같이 먹자! 나 햄 싸왔어~”     

그러자 찬수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혼자 먹는 거 좋아하잖아~ 그냥 오늘도 혼자 드셔.”     

찬수의 말에 선철이는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밉살맞게 구겨졌다. 


그리고 선철이의 그 모습에 속으로 통쾌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나에게 분홍 소시지에 대한 기억은 다 있다. 돈이 없어 부끄러웠던 기억. 못내 창피했던 기억. 그리고 끝끝내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픈 상처의 기억. 


그 시절 분홍 소시지는 가난의 상징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날의 분홍 소시지는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고 진짜 부끄러운 것은 가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남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가치를 깎는 행위라는 것도 말이다.


지금은 가끔 식당에 가면 계란 옷을 입혀 부쳐낸 분홍 소시지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시절 나는 계란 옷도 입히지 않은 분홍 소시지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갔던 기억이 물씬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나기도 한다. 


분홍 소시지를 싸갔던 날. 그때까지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짝꿍에게 함께 밥을 먹자며 당당하게 말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짝꿍에게 말하던 그 순간 내게 어떤 용기가 되어주었으므로.      


내가 지금 1평짜리 고시원에 살며 그 고시원 주방 한쪽에서 쪼그리고 컵라면에 딱딱한 찬밥을 먹을지라도. 오늘 푸짐한 한 끼를 먹고 나면 다음날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날이 있을지라도. 당장 저녁밥도 삼천 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시간들일지라도. 


뭐 어떤가. 나는 지금 미래의 멋진 나에게 투자하고 있는 거라고, 그날의 빛나는 내가 되기 위해 기꺼이 지금을 감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오늘이길. 나 자신을 스스로 궁지에 넣고서 현실을 비난하지 말길. 


이 고리타분하고 치열한 전쟁터 같은 서울에서도 이렇게 견디다 보면 분명,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괜찮은 하루가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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