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4-3
초등학교 때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각 반마다 진로에 대한 학생들의 설문조사를 할 때였다. 장래희망. 나는 그 앞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장래희망이란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까지 해본 적이 없었다. 장래희망 란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빤히 바라만 보다 슬쩍 짝꿍이 무얼 쓰는지 들여다보았다.
짝꿍의 장래희망은 의사 선생님. 뒤에 앉은 친구와 옆에 앉은 친구들은 각각 선생님이나 판·검사를 썼던 것 같다. 그리고 반 친구들을 휘 둘러보니 저마다 제 장래희망을 적을 땐 정말 장래에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된 것을 상상했는지 배시시 웃는 친구들도 보였다.
그 시절 나를 제일 당황하게 했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꿈이 뭐니?”
나는 꿈이 없었다. 무언가를 대단히 욕심내거나 욕심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유일하게 한 가지 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래서 입고 싶은 것도 마음껏 입고 먹고 싶은 것도 실컷 사 먹고 목회를 하며 고생하는 부모님께도 효도하는 것. 그게 다였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소박하고 정직한 꿈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돈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돈’이란 꿈 이상의 어떤 가치였다.
너무 없이 살다 보니 가난이 지긋지긋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내 궁리는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기어이 치킨 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내가 꼭 갖고 싶었던 운동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이 필요했고 내게는 돈이 절실했고 그보다 내 삶에 돈은 절박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땐 먹는 행복을 누리는 것보단 먹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갖고 싶은 게 있을 때도 그걸 한 번 가져보는 기쁨을 아는 것보단 내려놓는 법을 먼저 배워야만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해서 성취하는 보람보단 포기하는 법을 먼저 익혀야만 했다. 그러므로 내가 꿈꿀 수 있는 세상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게 꿈이란 부질없는 것이었고 꿈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허상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몹시 불행하고 불만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꿈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그날에 만족하는 법만을 알 뿐이었다. 꿈을 꿀 줄 모르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스물넷이 되던 그해.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으로 무언가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나 가치 없이 느껴졌고, 그보다는 이왕 돈을 버는 게 목표고 꿈이라면 제대로 한번 사고를 쳐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돈이란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벌기가 어려웠고 손에 쥐는 건 더더욱 힘들었다. 돈푼이나 쥐었다고 해도 결국 월세를 내고 전기세며 수도세며 공과금을 내고 나면 정작 내 손에 쥐어지는 건 단 돈 몇만 원이 전부였다. 제대로 대형 사고를 쳐보겠다며 마음먹은 ‘원대한 꿈’은 그렇게 점점 흐릿해져 갔고 나는 서울에서도 고향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게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삶을 맡기고 있었다.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일했고 보다 성실하게 했지만 돈은 어떻게 해도 벌리지 않았고 어떻게 해도 내 주머니에는 쌓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부아가 치밀었고 그냥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한 번에 뒤집는 사건이 생겼다.
그때까지 나는 120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였다. 밤을 새워서 일을 하고 나면 새벽 5시쯤이 되었는데 나는 매일 마감할 때 가게 대청소를 했다. 그저 청소 마무리를 좀 하고 퇴근하면 되었는데 굳이 대청소라니. 그것도 매일.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서울로 올라오기 전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생긴 버릇 때문이었다. 커피숍 여사장은 까칠하기로는 그 동네 일등인 사람이었는데 아르바이트생 중에 한 달을 넘긴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알만 한 인물인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일할 때 마감 시간에 늘 하던 일이 있었다. 소파 밑부터 카펫 청소까지, 매일 대청소를 했다. 사람은 적응력의 생물이라더니. 그때 했던 것이 몸에 배어 있던 건지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호프집 대청소를 매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달 쯤이 지나자 사장님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두 달간 성실하게 일을 해주어 고맙다며 매니저로 일을 해줄 것을 부탁해왔다. 나는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시급 아르바이트생에서 순식간에 매니저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었다.
꿈이란 건 참 터무니가 없고 허황된 무지개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꿈이란 거, 한번 꿔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기회가 한번 왔다고 해서 뭔가 대단히 내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는 것은 여전했고 나의 서울 생활은 깜깜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지 그 목표와 계획이 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보였다고 해야 할까.
어느 때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이 도시의 생활이 염증이 날 때가 있다. 이 도시 안에 숨겨진 수많은 치열함과 수많은 경쟁과 또 어지럽게 변해가는 도심의 모습들에. 그래도 결국 이곳에서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놓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내가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그것, 서울에 처음 올라올 때의 그 목표와 다짐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돈 벌러 서울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