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4-2
서울에 와서 제일 서러운 것은 정말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도, 돈도, 시간도. 밤낮이 바뀐 상태로 12시간씩 일을 하며 몸이 축나더라도 그 생활을 놓을 없을 때도. 술 취한 손님들로부터 괜한 시비와 욕지거리로 푸대접을 받을 때도. 그런 대우 속에서도 누구 하나 위로를 건네지 않을 때도 그랬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내게는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었다. 물론 이런 생활들은 어디까지나 내 선택에 의한 책임들이었지만 어느 날에는 대가가 참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에 치여 절고, 돈에 치여 절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절고. 절고, 절고, 절고. 나는 서울에 찌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날이면 절로 생각나는 시절이 있었다.
지치고 고달픈 생활들 속에서 떠올리기만 해도 힘을 주었던 친구들. 장유석, 윤태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악동 삼총사였다. 그 시절 나를 포함한 두 친구의 가정도 가난했다. 그래서 우리는 틈만 나면 돈을 벌 궁리를 했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는데 200원~300원에 새벽 신문을 사서 바닷가 텐트촌에다 천 원에 신문을 되파는 일이었다. 미성년자들이 벌 수 있는 최고의 돈벌이였던 셈이다. 그렇게 몇 번을 해보니 꽤 쏠쏠한 수입원이 되었다. 그러자 더럭 욕심이 생겼는데 원동기 면허증을 딴 후에 더 많은 신문을 떼다가 오토바이에 싣고 가서 팔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자면 수업을 땡땡이치고 면허시험을 봐야만 했다. 담임 선생님이 이를 허락해줄 리 없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상황.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뾰족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셋은 단체로 수업을 땡땡이치고 원동기 면허증을 따기 위해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우리 세 사람의 운명은 희, 비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로 원동기 면허증을 딴 사람은 나 하나였고 유석과 태수는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학교로 돌아가고 나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매타작이 시작되었는데 나보다는 유석이와 태수가 두 배는 더 많이 맞았다. 그깟 면허증도 하나 제대로 못 딸 위인들이 겁도 없이 땡땡이를 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이지만, 어디 한 군데 두 발을 딛고 서 있기도 힘든 서울 바닥에서 유일하게 나를 지탱해주는 어떤 에너지였다. 아무도 없이 홀로 아플 때에도 그랬고 처음 서울 땅을 밟으며 다짐했던 그 초심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 그만 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 가버리자! 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그랬고 서러움이 폭발해 있는 힘을 다해 목 놓아 울고 싶은 순간에도 그랬다.
토닥토닥 가만히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것 같은 그때의 기억들이 있어 지금까지 버티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또 얼마나 삭막하고 힘겹게 이 서울을 버텨내고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사업을 하다가 불쑥, 하루쯤 게을러지고 싶을 때 문득, 그리고 사회생활에 물이 들어가면서 이따금씩.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뇌리를 자극할 때가 있다.
이쯤 되고 보니 종종 꾀병을 부리고 싶어 지는 날도 생기고 무작정 땡땡이를 치고 어디라도 훌쩍 도망가고 싶은 순간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루하루 빡빡해서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 입성해 있기는 하다만, 그 와중에도 흐리나 가끔씩은 힐링을 주는 서울의 희뿌연 하늘도 좀 올려다보면서.
내 인생에도 꽃 피는 봄은 온다고. 오늘쯤은 살짝 기운을 줘보는 것도 괜찮은 하루이겠거니.
나는 그렇게 촘촘한 서울 땅에서 두 다리에 힘을 빳빳하게 주며 버텨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