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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경별진 Jan 20. 2023

보세가 어때서

내가 다니는 회사는 동대문 도매 시장 바로 옆이고, 내 직업은 MD이다. 벌써 이 회사에서 10년이 됐다는 사실이 나 역시 믿기지가 않는다. 시장은 10분만 걸으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실제로 사입을 나간 건 열몇 번 정도 되는 것 같다.


밤시장을 다니는 게 로망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내성적인 탓에 한번 다녀오면 기운을 다 빼앗기고 왔다. 실제로 사입을 가면 눈이 번쩍하지만 막상 잘 팔리겠다 싶은 옷을 고르기란 정말 쉽지 않다.


요즘에는 시스템이 좋아져서 직접 사입을 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우리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옷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하는 것 같다.


내 상사는 항상 이런 말을 한다. ‘잘 팔리면 좋은 옷, 안 팔리면 나쁜 옷.’


나는 어릴 때부터 브랜드 옷은 잘 사 입지 않았다. 비싸기도 했지만 어울리지 않았다. 옷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생 때부터 옷 구경을 많이 다녔다. 지금도 옷을 보는 게 좋고 재미있다.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이에 맞는 트렌드를 읽게 될 텐데, 고객들의 니즈를 잘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내게 다른 직업이 생긴다면 어떤 것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는 사람이다. 그건 브랜드든지 보세이든지 상관없다. 옷은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물론, 비싸고 좋은 옷은 그 가격만큼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본인의 경제 상황과 맞지 않는다면 자주 손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평범한 직장인이 충동구매로 200만 원짜리의 코트를 장만했다고 한다면 혹시나 뭐라도 묻을까 아까워서라도 평소에는 못 입고, 그 코트를 입고 갈 정도의 장소를 가게 될 때 입을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이 200만 원짜리 코트를 입고 가야 할 곳이 1년에 몇 번이나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현명한 소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브랜드 의류는 소재 자체가 워낙 좋아서 베이직한 디자인이라면 오래 두고 입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옷들을 보고 만져본 경험으로, 보세여도 국내생산 상품이라면 브랜드 못지않은 퀄리티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저가의 브랜드 옷들을 보러 가서 제조국을 보고 옷을 살펴보면 국내생산 보세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국내생산의 옷들을 더 구매하게 되는 것 같다.


국내생산의 옷들이 단가자체가 높기는 하지만 품질이 훨씬 좋아서 오래 두고 입을 수 있다. 퀄리티를 생각한다면 보세냐, 브랜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내생산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입보세에도 레벨이 있는데, 너무 저가가 아닌 이상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다. 요즘 한국에서는 수입보세가 워낙 강세이고 자신의 개성을 살리기 위한 유니크한 디자인을 많이 찾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수입보세가 디자인이 다양해서 인기가 많다.


그에 비해 국내생산의 옷들은 아무래도 가격 때문인지 인기가 없다. 그러다 보니 국내 제작사에서도 어떻게든 가격을 낮추려고 부단히 노력을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입원단으로 제작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봉제 퀄리티는 한국을 따라올 수 없다.


아무튼, 보세도 브랜드 못지않게 열심히 자신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 수입보세나 한국보세나 언제나 내 옷장 속에서 밤낮을 함께 보낸다.


SNS나 유튜브를 보면 명품이나 고가의 아이템들을 착용하는 것들을 많이 보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박탈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브랜드 이름으로 포장된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와 옷의 상태를 잘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쉽게 좋은 옷을 고를 수 있다.


그리고 왠지 사람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속마음이 어떤 상태인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이 가장 좋은 옷이고, 그 옷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은 바뀌는 것 같다.


옷을 사러 가면 가장 기쁠 때가 완전 내 옷 같은 새 옷을 발견할 때다. 그러면 그 옷은 바로 내 손에 들려온다. 그것이 보세이든지, 빈티지든지 아무 상관없다.


좋은 옷은 시간이 지나도 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 듯 언제나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인 것 같다. 나를 예뻐 보이게 해주는 기특한 내 옷.


보세가 어때서. 내게 잘 어울리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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