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는 사랑받는 것에서부터 존재가 시작되고 피난처가 생겨난다고 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곧 나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를 피난처로 생각하는 것은 부모는 아이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퍼부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부모의 사랑보다는 평생의 짝에게 받을 사랑을 갈망하고, 주고 싶어 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의 새로운 피난처,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나도 한 번쯤은 아무 생각 없이 사랑만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받은 만큼 내 슬픔도 사라져 버릴 것 만 같아서. 하지만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도 이내 현실로 돌아오면 혼자인 나는 외로운 고독 속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싶은데, 오히려 누군가의 적이 되어 잘 쓰지 않던 감정들을 소비하는때가 더 많았고, 지켜냈던 마음들을 조각조각 떨어트리곤 했다.
마치 좋아하는 구두 뒤 굽이 금세 닳아버리는 것처럼, 좋아하는 블러셔가 금세 바닥을 드러내는 것처럼 애석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건 이렇게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오래가길 바라는 관계에는 더 무심해진 것 같다. 좋아하는 감정이 커지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수만 가지 감정들을 몇 번의 잦은 경험들로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나는 자주 이런 감정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안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지만, 사람은 상대에 따라 다른 행동과 말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서로 자라온 환경과 생각과, 깨달은 것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내가 A라는 사람에게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 다르고, A라는 사람과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B와는 하게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가끔 내가 더 오래 알고 지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친구가 나타났을 때, 나와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고, 다른 것을 공유하고, 내게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사실 나는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다른 모습들이 있을 것이고, 어떤 상황이 오지 않으면 하지 않을 행동들과 써보지 않은 말들이 있다.
어쩌면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를 오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오해해야만 하는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감정의 불순물들은 빨리 버려야 했다.
하루 종일 머리와 마음이라는 곳에 쌓이는 이 불순물들을 버리고 나면 나는 다시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해 무언가를 찾았다. 부족한 사랑을 대체할 만큼 따뜻한 것들을 말이다. 나는 수많은 거절감과 성취감 사이에서 나를 지켜내야만 했다.
사람들이 하는 아픈 말에도, 한 번씩 찾아오는 절망적인 일에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쉴 틈 없이 흘렸던 눈물들이 마음에 모여져 굳어지도록. 울보였던 나는 이제 눈물이 잘 나지 않는다. 눈물은 무가치해서 흘려버리면 그만이라던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울면 기분이 풀릴까 싶어 억지로 슬픈 생각을 해보았지만 오히려 너무 힘들면 눈물조차 마른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문득, 이제 내가 어른이 된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본능의 결핍은 언어를 통한 착각 속에 숨어 있다가 언어를 통해 다시 나를 깨운다. 언어의 잔재가 주는 고통은 생각보다 크다. 나는 뉴스나, 주변인들의 흘리는 말들로 인해 과거나, 현실을 계속 떠올려야만 했다.
왜 나냐고, 왜 내가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항상 일이 생길 때마다 왜라는 말이 마음속에 가득 차 버렸다. 나는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무엇이든. 어떤 말이든 누군가가 해주는 위로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 상태에 빠져 있을 때는 누군가의 위로도 나의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내게도 안정감을 주는 사랑이 지속되기를 바래본다. 마치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달라보이는 것처럼.
아직은 혼자만의 방법을 찾는 수밖에.